집 한 채 놓여있다. 바람벽인 듯 여린 나뭇결을 얼기설기 겹쳐놓은 집은 허술하다. 언제든 떠날 이의 임시거처처럼 보인다. 검푸른 바다, 메마른 고깃배와 희미하게 보이는 냉동창고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불안과 상실이 내면화된 어느 남자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지난 13~14일 속초문화예술회관 무대에 오른 극단 파람불의 연극 <그날, 그날에>(연출 변유정)는 지난해 작고한 작가 이반의 대표 작품이다. 망향의 서러움을 안고 그리움의 정서로 일상을 살아가던 청호동 실향민, 그 변방의 이야기를 서사로 만들고 미학으로 끌어올린 최초의 예술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1979년 극단 ‘광장’이 대한민국연극제에 출품해 당시 문화공보부장관상, 희곡상, 남우주연상 등을 수상했다. 이 작품이 세상 밖으로 나온 후 1980년 1월 <경향신문>에 아바이마을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연극 <그날, 그날에>는 실향연극의 대표작이자 속초 실향민 문화를 전면화시킨 명작이다.
희곡에 대한 존중, 묵직한 연기
이 작품은 고향 떠나온 지 20년이 된 실향 1세대의 망향의식과 그 아들과의 세대갈등을 보여주는 사실주의 연극이다. 실화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는 마지막 충격적 사건은 극적 긴장감을 주기는 하지만, 현재의 시각에서 공감은 약할 수밖에 없다. 실향민 언어를 가장 잘 구사했다는 대사는 대중성이나 전달력에서 오히려 약점이 될 수도 있다. 연출가 변유정은 이러한 약점을 감추기 위해 각색을 하거나 특별한 연출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향민 어르신을 찾아가 희곡 속 사투리의 의미를 찾아내고, 정확한 억양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다. 흡사 이반 희곡을 중심으로 실향민 문화를 아카이빙하듯 접근한 것이다. 이 같은 태도는 연출이 의도했든 안했든 실향민 1세대가 공동체 언어를 통해 그들 스스로의 특수성을 내보이고 긍정적인 가치로 전환하는 언어이데올로기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는 연구결과와도 연결된다(더 자세한 내용은 ‘아바이 말 그리고 나의 말 : 속초시 청호동 사람들의 언어이데올로기 내 세대 변화와 정체성’ 김성인, 서울대 참조). 희곡의 언어에 대한 존중을 위해 배우들은 대사 하나도 정확히 담기 위해 노력했고, 그 뜻을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 그 자체가 실향 1세대와 지금 관객을 연결시키기 위한 방법론인 셈이다.
희곡에 대한 존중은 몇몇 지문을 내레이션으로 연출한 것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반 작가의 지문까지도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은 연출가의 진정어린 뚝심이 느껴진 것이다. 때로 내레이션이 소격효과를 보여주기도 한다. 감정의 동화를 막고 지금 무대에서 펼쳐지는 실향의 애환에 대해 객관적 자세를 요구하는 장치가 되는 것이다. 느린 전개, 익숙하지 않은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장면에서 충격과 비통함, 애절함을 느꼈다면 그 절반은 배우들의 몫이다. 특히, 김 노인 역의 김강석은 어떤 배역도 소화 가능한 배우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후배 연극인의 재해석 필요
실향의 아픔을 안고 집단으로 거주하는 실향민 이야기는 반공의 경계를 허물고 휴머니즘의 세계로 지평을 확대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극작가 이반은 그 자신 흥남철수 때 아버지의 손을 잡고 속초에 정착하여 뱃사람의 아들로 살아왔기 때문에 실향민의 실향의식과 생생한 삶의 모습을 표현할 수 있었다. 그의 작품 무대는 대부분 속초항과 청호동이다. 그에게 속초항은 “떫은 미역 냄새와 비릿한 꽁치 냄새”이며 “어판장에서 떠드는 소리, 고기를 헤아리는 어부들과 아낙네들의 고함소리”이다. 그는 이곳에서 어머니의 품과 같은 아늑함을 느끼고, 어판장의 사람들과 동화되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그에게 청호동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노인은 “하루 한번 이상 북을 바라보며 고향을 생각하는” 존재이며 우리에게 “그만한 리얼은 없다”고 말한 후 “우리 민족의 문제의 문제뿐 아니라, 세계가 해결해야 할 세계인의 근본문제”(연극 ‘그날, 그날에’ 작가 후기)라고 인식을 확장한다. 맨 몸으로 청호동 모래톱에 정착하여 바다를 배경으로 억세게 살아왔던 청호동 사람들, 그곳에서 분단의 세월을 살아가는 실향민의 삶. 작가 이반은 <그날, 그날에>를 통해 실향의 아픔이 그대로 오늘의 문제이며, 우리가 넘어야할 세계사적 사건이라고 항변한 것이다.
속초의 실향문화는 생활문화에서 시작하여 예술가 특유의 시선으로 그 가치를 드러내었고 이제는 대표적인 관광상품이 되었다. 작가 이반이 구축한 세계는 더 이상 만나지 못하지만 그의 문제의식을 확장하고 극복하는 일은 후배 연극인의 과제가 되었다. 내년에 극단 파람불이 다시 재해석하는 이반 작가의 작품은 무엇이 될까. 그날이 기다려진다.
김인섭 전문기자
지난 13~14일 속초문화예술회관 무대에 오른 극단 파람불의 연극 ‘그날, 그날에’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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