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직업병 분쟁이 해결된 지 벌써 1년이 지났지만 황상기 대표의 삶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수년간 이어오던 노숙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된 것은 맞지만 황 대표는 여전히 택시를 몰면서 한 달에도 몇 번씩 사회운동의 현장으로 달려간다. 올해 초에 진행된 인터뷰에서 황 대표는 삼성과의 분쟁이 해결됐고 본인의 체력도 예전 같지 않아 앞으로 사회활동을 줄일 거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현재 황 대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11월 말부터 12월 초에 일본 나가사키를 방문, 노동자의 안전에 관한 세미나에 참여했다.
올해 황 대표의 일상적인 삶은 크게 바뀌지 않았어도 변화된 점, 새로운 점도 분명히 있다. 황 대표는 이번 연도에 여러 상을 받았다. 속초시 시민의 날에 자랑스러운 시민상(인권평화부문)을 수상했고, 노동재해 피해가족 네트워크 ‘다시는’의 일원으로서 재단법인 ‘진실의힘’이 주는 인권상을 받았다. 그리고 속초시민노동단체연대가 주관한 6·10 민주항쟁 32주년 기념문화제에서 민주화운동 공로자로 선정됐다.
그리고 올해 황 대표는 10여 년 전 마을 사람들에게 진 빚을 갚았다. 황 대표가 사는 동네에는 수십 년 동안 거주한 이들이 많은데 2005년 딸 유미 씨가 백혈병에 걸렸을 때 동네 주민들이 돈을 모아서 황 대표에게 건넨 일이 있다. 황 대표는 이를 잊지 않고 올해 주민들에게 보답했다. 황 대표는 마을 통장에게 돈을 전달했고 이 돈은 무더운 여름날 집집마다 삼계탕을 대접하는 데 쓰였다.
또한 황 대표는 몇 주 전 막내아들을 장가보냈다. 작년에 둘째딸의 억울한 죽음을 달랬다면 올해는 아들의 결혼을 통해 수십 년간 이어온 자식 걱정을 한시름 덜게 됐다.
삼성과의 분쟁이 해결된 후 황 대표의 삶에 가장 큰 변화는 황 대표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가령,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알아보는 사람을 마주하는 등, 가끔 길에서 이런 일을 겪는다. 사람들이 알아봐 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게 되면서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고 한다.
멀지만 가야할 길
노동자가 안전하게 일할 수 있고 노동 3권(단결권, 단체행동권, 단체교섭권)이 보장받는 것은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숙제이다.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는 언론에 보도될 만큼 심각한 산재 사고가 자주 발생해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고 법으로 보장된 노동조합 설립이 무슨 큰 죄를 짓는 것처럼 적대시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산업재해 사망률 1위이다. 매년 2000명가량의 노동자가 업무로 인한 사고나 질병으로 숨지는데 하루에 6명 정도 목숨을 잃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의 산업재해율은 2017년 기준 0.48%로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평균과 비교하면 산업재해율이 1/4 수준으로 낮다. 산업재해율이 낮은데 산업재해 사망률이 1위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한국에서는 상당수의 산업재해가 은폐된다는 진실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산업재해가 은폐되는 것은 건강보험 재정누수와 연결된다. 산재보험으로 처리해야 할 사고나 재해가 건강보험으로 처리되면서 이런 일이 생긴다. 서울대 ‘산재은폐로 인한 건강보험 재정누수 방지방안 연구’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산업재해 발생 시 실제 산업재해로 처리하는 비율은 38.9%에 불과하다. 또한 같은 연구에서 2016년의 산재은폐에 따른 건보 재정누수를 최소 277억 원에서 최대 3,218억 원으로 추계하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사업주의 산재 예방 노력을 증진하려는 취지로 개별 사업장에서 3년간 발생한 산재로 인해 지급된 보험급여 액수에 따라 산재보험료를 할인, 또는 할증한다. 기업이 산재를 은폐하고 산재보험료를 할인받거나 할증을 피한다면 이는 국민들이 건강보험료로 부담하게 된다. 기업의 책임이 국민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혹자는 한국에서 노동자는 과잉보호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맞지 않다. 노동 관련 통계나 조사를 보면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산업재해 사망률이 1위인 것 말고도 노동시간도 문제다. 작년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1993시간으로 OECD 회원국 중 두 번째이다. 지난해 OECD 회원국 연평균 노동시간은 1759시간이며 하루 8시간 기준으로 한국 노동자들은 OECD 평균보다 29일이나 더 일했다.
비정규직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은 OECD 국가들 평균에 비해 비정규직 비율이 2배 정도 된다. 급여, 직장 내 괴롭힘, 점심 결식, 산재 경험 비율 등 노동자가 처한 현실에서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심각하다.
노동 3권이 제대로 보장되는 나라라면 비정규직, 노동 시간, 산업재해 문제가 이럴 수 있을까? 노동조합이 적절하게 기능하는 사회라면 문제가 심각해지기 전에 노동자와 경영자, 관료, 정치인의 대화를 통해 제도적 보완이 가능했을 것이다. 황 대표는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여러 번에 걸쳐 이 문제를 지적했다. 황 대표는 딸이 직업병으로 숨진 것도 근본적으로는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의 권리가 약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라 본다. 황 대표는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노조를 할 권리가 온전히 보장되고 어린 학생들의 교육과정에서부터 노동권 교육이 절실하다고 역설한다.
황상기 대표의 삶, 의미 깊은 이정표
60대 중반인 황 대표는 여전히 사회운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아마도 머지않아 이전처럼 사회문제에 관해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서울 등을 오가며 더위와 추위를 이겨내고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현장에 선다는 것은 체력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황 대표가 활발한 활동을 멈추더라도 황 대표가 지향해온 가치만큼은 변함없을 것이다.
황상기 대표는 삼성전자 반도체 산업재해 분쟁 해결에 있어 중심이었다. 이것만으로도 그의 삶은 사람들에게 의미 깊은 이정표가 된다. 이 이정표를 보고서 누군가는 다시 희망을 품고 그의 길을 따를 것이다.
<끝>
구술 황상기 반올림 대표
정리 이광호 객원기자 campin@hanmail.net
황상기 대표(사진=황상기 대표 제공)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