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모두가 잠든 새벽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이 있다.
항구에 묶여 있던 배를 움직여 바다로 나아간다. 살을 에는 듯한 초겨울 칼바람에 옷깃을 단단히 여며도, 파고드는 시린 바닷바람을 이길 장사는 없다. 35년간 어부로 살아온 박영철 선장(63, 사진)에게도 겨울은 혹독한 계절이다. 그래도 도루묵이 제철을 맞아 하루 200kg씩 잡혀주니 요즘만 같아란 말이 절로 나온다고 한다.
박영철 선장의 고향은 고성군 간성읍 아야진이다. 이곳에서 나고 자랐고, 뱃일을 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에게 다른 꿈은 없었다. 그저 자신의 배 한 척을 갖는 것, 그것 하나가 꿈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는 이미 꿈을 이룬 셈이다. 3톤급의 작은 배이긴 하지만, 처음 그 배를 타고 조업을 나갔던 첫날을 기억하면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35년의 세월을 바다에서 보냈다. 아야진은 그에게 고향이었고, 63년 인생의 전부였다. 그리고 그 인생을 함께 살아온 가족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가족은 선물 같은 존재
박영철 선장과 함께 박영선(70)·박영재(60)·박영섭(65)·박영환(62) 씨는 마치 독수리 오형제처럼 아야진을 지켜왔다. 이들은 친형제, 사촌형제지간이다.
그들은 추억이 같았고 살아온 삶이 같았다. 어떤 약속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명태잡이로 생계를 이어가던 어민들이 사라진 명태와 함께 하나, 둘 고향을 등졌지만, 이 다섯 형제만큼은 고향을 지켰다. 그리고 이 모두가 선주가 되어 고된 만큼 보람도 큰 어민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다들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이라곤 건강과 성실함뿐이었다. 하루 끼니를 걱정하던 힘든 시기에도 먹을 것을 나누고, 서로가 서로에게 버팀이 되는 삶을 살아오면서 이제 이들은 죽는 날까지 함께할 운명 공동체처럼 살아가고 있다.
가족 우애 지켜준 아내에게 고마움
오전 6시 30분. 조업을 나갔던 배들이 돌아오고, 포구는 분주해졌다.
남편이 돌아오길 기다리던 아내들은 빠르게 자리를 잡고 그물에 걸린 도루묵을 떼어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바삐 움직이는 손길, 다들 3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베테랑이다. 고향은 제각각이지만 아야진의 다섯 형제의 아내로 살아가면서 그녀들의 추억도 서로 닮아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하고 아야진에 뿌리를 내리고 살면서, 절로 생겨난 가족들 덕에 심심할 틈이 없었다.
저마다 어린 자식들을 업고 걸리면서 남편을 따라 어부의 아내로 살았고, 그렇게 생긴 끈끈함은 딱히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박영철 선장의 아내 이계숙(60, 사진)씨는 형제간의 우애를 다지는데 큰 몫을 담당했다.
집안 대소사는 물론 가족들의 생일도 그냥 넘기는 법이 없었다. 1년의 한 번이라도 가족이 다 함께 떠날 수 있는 여행을 계획해 실행에 옮겨왔다.
박 선장은 이런 아내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한 가득이다. 유독 몸이 약한 탓에 그간의 삶이 힘들었을 텐데, 지금껏 불평 한번 하지 않고 남편의 곁을 지켜준 것이 가장 고마운 일이다.
이제 남은 삶은 좀 쉬엄쉬엄 살자는 남편의 이야기에도 건강할 때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지, 배부른 소리를 한다며 타박을 하는 아내가 사뭇 사랑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다고 한다.
같은 꿈꾸며 행복 나눠
한 마을에 다섯 형제가 살고 있었다. 이 우애 좋은 형제들은 바다에 살면서 같은 꿈을 꾸고, 행복을 나눴다. 이제 노년을 바라보는 나이, 잠시 되돌아본 아야진 고향 마을엔 다섯 형제의 어린 시절 추억이, 그리고 그 자식들의 어린 시절 추억이 새겨진 그들만의 세상이 있었다.
“형님, 오늘 점심은 우리 집에서 해요!” 돌림 노래처럼 매일 듣는 이 정겨운 한 마디.
아야진을 지키는 다섯 형제는 오래도록 이런 삶을 살아갈 것이다.
김미영 기자 nurugo@hanmail.net
아야진항에서 박영철 선장 부부가 새벽에 잡아들인 도루묵을 그물에서 떼어내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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