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7일에 삼성그룹 본사 앞에서 시작한 반올림의 농성은 2018년 7월 25일까지 3년이 가까운 세월 동안 계속됐다. 농성을 시작한 후 반올림과 삼성의 직접 대화는 재해예방대책 논의 외에는 이뤄지지 못했고 대리인을 통한 간접 대화를 비공개로 드문드문 할 뿐이었다. 이 상황에 변화가 생긴 것은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태에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이 연루돼 삼성이 수세에 몰리면서이다.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태가 발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황상기 대표가 농성장 당번이던 날, 반올림 지원을 나온 이들이 촛불집회에 가자고 황 대표에게 권유한 적이 있다. 그날 황 대표는 농성장을 지킨다고 광화문 집회에 가지 못했는데 집회에 참석했던 이들은 2천 명 정도가 모일 줄 알았던 집회에 2만 명 정도 왔다며 고무된 감정을 전했다.
촛불집회 참가…이재용 부회장 재판 참관
반올림은 촛불집회에 적극 참여했다. 촛불시위 관계자 회의에 이종란 노무사가 반올림을 대표해 나갔고 1주일마다 한 번씩 열리는 촛불집회에 반올림 차원에서 현수막과 전단을 만들어 참가했다. 집회가 열리던 어느 날에는 첫 번째 발언자로 황 대표가 나섰다. 촛불집회에서는 많은 이들이 반올림에 관심을 가져줬다. 언론에서도 삼성을 비판하는 보도들이 이어졌고 재벌 해체의 목소리도 커졌다.
촛불집회가 계속되던 시기에는 많은 이들이 반올림을 도와주는데도 일이 넘쳐났다. 집회 준비를 하고 집회 현장에도 나가고 회의를 자주 진행하며 농성장을 지키다 보니 황 대표는 입술이 퉁퉁 불어터질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못했다.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을 비롯한 삼성 경영진 여러 명에 대해 첫 번째 재판이 있던 날, 황 대표와 반올림 관계자들이 재판을 참관했다. 재판을 마치고 삼성 관계자들이 나올 때 황 대표는 그들에게 삼성이 왜 반올림과 대화를 하지 않는지 따져 물었다. 두 번째 재판이 끝난 후에도 황 대표는 삼성 관계자들에게 강하게 항의했다. 세 번째 재판에서는 삼성그룹 이재용 부회장이 재판 진행 중에 황 대표를 자꾸 쳐다봤다. 판사가 오전 휴정을 선언한 후 황 대표는 이재용 부회장에게 항의할 생각으로 다가갔으나 이 부회장은 수감자 전용 쪽문으로 서둘러 빠져나갔다.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 1심 결심공판이 있던 2017년 8월 7일에는 재판 시작 전부터 난장판이 펼쳐졌다. 박근혜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재판 시작 전에 황 대표와 삼성전자 산업재해 피해자 한혜경 씨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한 씨는 1995년 삼성전자 기흥공장에 입사해 일하다 퇴사 후 2005년에 뇌종양 진단을 받고 중증 장애로 휠체어에 의지하게 된 사람이다. 결심공판이 있던 날 박근혜 전 대통령 지지자들은 재판 참관을 위해 줄을 선 황 대표와 한 씨에게 “병X들이 왜 여기 와있어?”, “돈 뜯어내려고 왔냐?”, “인천 앞바다에 들어가라” 같은 막말을 쏟아냈다. 그런 막말을 억지로 참아내던 한 씨와 한 씨의 어머니는 잠시 후 법원 벽에 기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황 대표 역시 함께 울면서 이들을 달랬다.
조정위원회 중재안 수용
이재용 부회장과 삼성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2018년 7월 21일, 삼성이 조정위원회의 제안을 수용하기로 하면서 삼성전자 직업병 문제를 둘러싼 분쟁은 해결을 눈앞에 두게 됐다. 이에 따라 3일 뒤인 24일, 반올림과 삼성전자, 그리고 조정위원회는 중재합의서에 서명했고 다음날 반올림은 3년 가까이 이어오던 삼성 본사 앞 농성장을 드디어 정리했다.
반올림과 삼성의 입장, 그리고 기존의 연구 결과, 전문가 자문을 참고한 조정위원회의 중재안은 11월 1일에 나왔고 이 역시 반올림과 삼성이 모두 수용했다. 중재안은 보상, 사과, 재발방지 및 사회공헌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보상은 피해자 구제를 최우선으로 하기 위해 보상범위가 넓게 잡혔다. 삼성전자 반도체나 LCD 라인에서 1년 이상 일한 사람 중 질환의 업무 관련성이 의심되나 인과 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이들도 포함됐다. 사과는 대표이사가 공개적으로 사과문을 읽고 피해자에게 우편으로 발송하기로 했고 삼성전자가 산업안전보건 발전기금 500억 원을 내놓기로 했다.
2018년 11월 23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중재판정 이행합의 협약식이 열렸다. 황 대표는 언론의 수많은 플래시가 번쩍이는 가운데 삼성전자 김기남 대표이사와 악수를 나눴다. 유미 씨가 삼성전자 반도체 산업재해로 백혈병에 걸린 지 13년 만에, 반올림이 활동을 시작한 지 11년 만의 일이었다.
<다음에 계속>
구술 황상기 반올림 대표
정리 이광호 객원기자 campin@hanmail.net
2017년 3월, 유미 씨 10주기를 맞아 열린 ‘삼성전자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문화제’에 참가한 황상기 대표.(사진=반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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