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찬바람이 휑하니 불던 한 겨울에 사무실 이전을 했었다. 주변에는 논이며 밭들이 군데군데 있고, 차로 2~3분 거리에는 예쁘게 새로 지은 펜션들이 곳곳에 있는 한적한 곳이다. 흔히들 경치 좋은 전원주택에서 살고 싶다고들 하는데 새로 이전한 사무실이 있는 곳은 전원주택이 아니라 ‘전원사무실’이라고 칭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다. 게다가 설악산 울산바위와 달마봉이 정면에서 아주 가깝게 보이는 곳이어서 풍광이 제법 근사하다. 생각해 보면 집에서는 잠만 자고 나오고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사무실에서 보내기에 어쩌면 이게 바로 전원생활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계절은 돌고 돌아 다시 가을의 끝자락, 겨울의 문턱 앞에 와 있다. 농촌과 어촌이 공존해 있는 이곳 속초에서 살았지만 부모님이 농사일이나 바다일과는 관계없는 일에 종사하셨고 나 또한 그렇기에, 살면서 올해처럼 사무실 옆 논에서 이뤄지는 한 해 농사를 시작부터 끝까지 다 본 건 처음이었다. 겨우내 얼어붙어 있던 논에 봄기운이 살랑살랑 돋자 논을 갈아엎고 물대기를 하고 모내기를 하고, 한여름 태양 볕에서 매일 매일 푸르게 자라고 이제 가을이 되자 추수를 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사무실 옆에서 하나하나 세심하게 볼 수 있음이 은근한 기쁨이 되었다. 이제는 가을걷이를 끝낸 텅 빈 논두렁 옆에서 풍성하게 자라나 무심한 듯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들만이 헛헛한 가을 풍경을 만들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이라는 게 늘 버겁기도 하고 예기치 못한 여러 가지 일들로 어려움이 생기기도 한다. 가까스로 피해가기는 했지만 아직도 완전한 해결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지난 봄 고성, 속초 산불과 같은 일이나 직원들의 급작스런 발병이나 개인의 가정 사유로 한꺼번에 결원이 생겨 구인에 어려움을 겪었던 일 등은 어떻게 대비하기가 어려운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자연과 가깝게 지내게 됨은 번잡한 곳에서의 삶보다는 조금 더 사람을 여유롭게 하는 것 같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도심에서 있었을 때 보다 조금은 더 너그럽게 조금은 더 긍정적으로 일처리를 하게 된다.
다만 단점이 하나 있다면 경관이 좋은 곳에서 근무하다보니 이성보다는 감성이 좀 더 잘 발현된다는 점이다. 게다가 나이가 들어도 내 속의 소년이 없어지지 않는 탓인지 해마다 가을을 잘 타는 편인데 요즘엔 내가 부쩍 더 허한 느낌이 많이 들어 보였나 보다. 질풍노도의 사춘기 터널을 막 빠져나오고 있는, 이제는 나보다도 훌쩍 더 키가 커진 아들이 내게 타이른다. “아빠가 지금 갱년기라서 그래요. 갱년기라고 꼭 그 때 나타나게 되는 증상들을 모두 겪을 필요는 없어요. 마음을 잘 추스르세요~” 내가 아들의 사춘기 초입 때 그에게 했던 말을 기억했던지 사춘기를 갱년기로 바꿔 그대로 내게 똑같이 말한다. 에구….
이제 올 해도 한 달 남짓한 시간들만 남았다. 내 주위를 둘러싼, 예년보다 훨씬 더 많았던 여러 가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그와 동시에 올 한 해 남아 있는 시간들이라도 열심히 채워나가야겠다는 의지가 생긴다. 그리고 청명하게 맑은 하늘과 단풍 물든 가을 산을 바라보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고통의 신음이 아니라 기쁨의 숨결이 되는 이 가을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게 된다.
전형배
데일리F&C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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