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 대표에게 딸의 죽음은 금전적 보상을 받고 끝내버릴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공론화를 통해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였다. 황 대표가 보기엔 딸 유미 씨가 삼성전자에서 일하다가 목숨을 잃은 것은 근본적으로 삼성전자가 노동안전을 소홀히 한 데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따라서 황 대표는 삼성전자로부터 피해보상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산업재해의 원인을 제대로 규명하고 노동 환경을 향상시키는 일이 무엇보다도 절실하다고 봤다. 이렇게 할 때 장차 딸과 같은 피해자를 막을 수 있고 또한, 딸의 억울한 죽음을 달랠 수 있다고 여겼다.
우리 사회에서 노동안전을 등한시하는 것은 삼성뿐만 아니라 여러 기업들이 보이는 행태이다. 안타깝게도 작업장 안전사고는 언론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일이며 이는 객관적인 지표로도 확인된다. 한국의 산재사고 사망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이런 문제를 절감한 황 대표는 산업재해가 발생하는 구조를 바꾸려는 노력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구조를 바꾸려 하지 않고 피해자의 개별 보상에만 치중하는 것은 황 대표가 가고자 하는 길과는 궤를 달리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사회를 바꾸는 일은 장기적인 과제이기에 황 대표는 이런 문제에 꾸준히 천착할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산업재해를 대하는 삼성의 태도를 볼 때 반올림 같은 단체가 없이는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할 것으로 보였다.
또한 황 대표는 반올림 탄생에 주춧돌을 놨던 사람이기에 반올림에 대한 감정이 남달랐다. 자신마저 반올림에서 빠지면 반올림이 무너질 것만 같아 도저히 그런 선택을 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황 대표는 삼성의 회유와 가대위 참여 권유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더 광범위하고, 더욱 강력한 사회운동을 이끌 조직이 아니고서는 애초에 황 대표가 반올림 외에 다른 곳을 선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조정위원회 참여
2014년 11월, ‘삼성전자 반도체 등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조정위)’가 발족해 그 다음달부터 조정위·삼성·가대위·반올림의 협상이 시작됐다. 반올림은 애초에 제3의 중재기관을 통한 중재가 아닌 삼성과의 직접 대화를 원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조정위원회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삼성과 가대위가 합의를 해버리면 반올림은 어정쩡한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삼성은 협상 초기에 제3의 중재기관을 원했지만 정작 조정위원회에 참여한 이후에는 이상한 행보를 보였다. 2015년 7월, 조정위가 삼성전자의 1000억 원 규모 공익재단 설립 등을 요구한 조정권고안을 발표했을 때 반올림은 이 권고안을 수용했다. 하지만 가대위는 조정위 권고안을 거부하고 삼성전자에 직접 협상을 요구했고 삼성은 가대위의 제안을 수용했다. 삼성전자는 조정위의 권고안을 무시한 채 2015년 9월, 가대위가 참여하는 ‘반도체 백혈병 문제 해결을 위한 보상위원회’를 발족시켜 보상접수를 시작하고 피해자에 대한 보상금을 지급해 나갔다.
삼성이 만든 보상위원회에서는 여러 잡음들이 들려왔다. 삼성의 보상위에 갔다가 반올림으로 다시 온 어떤 이는 치료비와 간병비 등 병을 고치는 데 들어간 경비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보상금을 준다는 말에 낙심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삼성의 보상위원회가 마련한 보상에서는 대상자 기준이 높았다. 또한 어떤 이는 삼성과 합의한 내용을 발설할 경우 보상금을 물어내야 한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고 밝혔다.
삼성그룹 본관 앞 농성 돌입
삼성의 보상위원회가 발족한 이후 삼성의 교섭단은 10월 7일 개최된 삼성 직업병 문제 해결을 위한 제6차 조정회의에서 무성의한 모습을 보였다. 조정위원들이 삼성 교섭단에게 삼성이 만든 보상위원회에 대해 물어보면 ‘잘 모른다’, ‘내 담당이 아니다’, ‘서면으로 답하겠다’는 식으로 반응했다. 가대위에서는 교섭 당사자들이 전원 불참했고 대리인을 통해 전하는 의견이 삼성전자의 입장과 비슷했다. 그리고 회의가 끝난 후 삼성 교섭단은 기자들 앞에서 반올림을 비난했다. 잠시 후 언론에서는 ‘반올림이 무리한 추가 기부를 요구했다’, ‘반올림이 사실상 조정권고안을 거부했다’는 왜곡된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향후 새로운 피해자가 나올 경우를 대비한 예산이 필요하다고 말한 점을 무리한 추가 기부로 매도했고 언론들은 이를 받아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반올림은 조정회의가 끝난 직후부터 삼성그룹 본관 앞에서 무기한 농성에 돌입했다. 황 대표는 택시 운전을 하면서도 며칠에 한 번씩 서울로 가서 1박 2일, 혹은 2박 3일 노숙농성에 부지런히 참여했다.
<다음에 계속>
구술 황상기 반올림 대표
정리 이광호 객원기자 campin@hanmail.net
2015년 9월, 삼성 본관 앞 ‘삼성 직업병 피해 노동자 문화제’에 참여한 황상기 대표(사진=반올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