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장애가 없는 한, 사람은 성장과정에서 때가 되면 누구나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글을 읽고 쓰는 일은 따로 배우고 익혀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생각을 말 할 수 있을 수는 있지만 그 생각을 편지나 메일 등 글로 전달할 수 없다면 그 또한 답답하기 그지없는 일일 것이다. 며칠 전 법정 공휴일로 재 지정된 한글날을 보냈다. 글자가 창제된 날을 기념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 우리나라 밖에 없다고 한다. 글자의 창제와 사용 시기를 특정 지을 수 있는 글자가 세상에 얼마나 될까 싶은 생각이 들어 이 또한 뿌듯함을 느끼게 한다.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운 우리 글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에는 한자의 영향이 곳곳에 많이 스며있다. 특히 아쉬운 부분은 우리 한글이 형용사나 부사 접속사 등에는 많은 어휘들이 있지만 명사에는 순 우리말이 많지 않다는데 있다. 이는 한자어가 표의문자여서 짧은 어휘 안에 많은 뜻을 담을 수 있고 한글은 표음문자여서 그렇지 못하다는 한계가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새 인가 우리가 흔히 사용하던 ‘신입생’, ‘신입사원’ 등의 용어가 ‘새내기’로 변해가고 있고, ‘써클’ 같은 외래어가 ‘동아리’로, ‘벤또’, ‘다꾸앙’ 같은 일본어가 ‘도시락’, ‘단무지’ 등으로 폭넓게 변화되어 가고 있음은 아주 긍정적인 변화가 아닐까 싶다.
글은, 문자는 권력이다. 중세 유럽에서 언어로서는 전혀 사용되어지지 않던 라틴어가 문자로서는 그 위세를 떨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민중들의 배움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당시에는 소수의 특권층과 성직자, 학자들만이 라틴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그것은 곧 정보와 민중들의 의식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었음을 뜻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도 법조계에서 사용되는 법률용어와 의료계에서 사용되는 의학전문 용어들을 보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용어들이 많다.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사용할 수도 있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용어로 대체가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대중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그들만의 권위와 전문성을 강화하는 방편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언론계 쪽에서도 보면 90년대 초반까지도 우리가 읽던 신문은 대다수가 일본식으로 세로쓰기가 대세였고, 그나마도 기사 제목과 중요 용어들은 한문으로 씌어져 한문을 따로 공부하지 않고는 신문을 읽을 수조차 없었다. 지금처럼 누구나 순 한글로 된 신문이나 인터넷뉴스를 읽을 수 있는 시대에는 생각지 못할 정보의 독점화, 편중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배경이 되었던 것이고, 신문을 읽을 수 있음이 지식인의 표상이 되던 때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말인지 조차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는 ‘단미’, ‘그린비’라는 순 우리말이 있다. ‘단미’의 ‘미’는 어미, 할미와 같은 여자를 뜻하는 말이고, ‘달콤한’의 뜻인 ‘단’과 결합하여 달콤한 여자, 즉 사랑스런 여자라는 말이다. 영어처럼 느껴지는 ‘그린비’의 ‘비’는 아비, 오라비와 같은 남자를 뜻하는 말이고, ‘그리워하다’에서 따온 ‘그린’과 결합되어 ‘그린비’ 즉 그리워하는 남자라는 말이다. 사랑하는 연인을 일컫는 순우리말 ‘단미와 그린비’, 참 예쁜 말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어휘이다. 글을 쓰다 보니 젊은 시절 읽었던 소설가 ‘박영한’의 ‘머나먼 쏭바강’이라는 책이 생각난다. 소설 속에서 작가는 우리가 흔히 쓰던 ‘그녀’라는 말 대신 ‘그미’라는 표현을 썼음이 문득 떠올랐다. 그 때는 참 생소하게 느껴졌었는데 이제는 사회가 폭넓게 수용한다면 ‘그미’라고 써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순 우리말 중에는 우리가 사용하지 않고 있을 뿐, 아름답고 예쁜 말들이 많이 남아있다. 또 한 번의 한글날을 보내면서 더 이상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전에 순우리말을 발굴하고 대중화시키는 노력들이 곳곳에서 벌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전형배
데일리F&C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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