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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의 택시운전사 황상기의 살아온 이야기<13> – 이종란 노무사와의 만남
10억을 제시한 삼성
등록날짜 [ 2019년09월02일 15시30분 ]

딸이 세상을 떠난 후 황상기 대표의 아내는 심각한 소화불량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강릉까지 가서 진료를 받았지만 잘 낫지 않았다. 제천에 용한 병원이 있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거기로 갔고 아내는 그 병원에서 두 번이나 입원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아내의 우울증은 오래도록 지속됐다.
 열성적으로 취재에 나섰던 <수원시민신문>의 기자 역시 <말>지의 기자처럼 황 대표가 전문가와 연결될 수 있게 주선했다. 기자는 다산인권센터를 소개했고 다산인권센터에서는 이종란 노무사가 황 대표에게 연락할 수 있게 했다. 황 대표는 8월 어느 무덥던 날에 동서울터미널에서 다산인권센터 박진 활동가와 민주노총 경기본부 이종란 노무사를 만나 울분을 토하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민주노총 이종란 노무사 만나
2007년 9월 산업안전보건공단이 삼성전자 기흥공장에 대해 역학조사(작업환경 측정)를 실시했다. 황 대표는 유미 씨의 유족으로서 조사를 참관했다. 유미 씨는 생전에 공장 3라인에 배치된 24대의 기계 사이에 칸막이가 없고 공장 안이 더워서 땀이 흐를 정도라 했지만 현장조사 당일에는 상황이 달랐다. 공장이 환기가 원활해 서늘했고 기계별로 칸막이도 돼 있었다. 유미 씨가 투병 중일 때 3라인에 공사를 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를 통해 공장 환경이 다르게 변했다고 추정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황 대표는 변화된 조건에서 조사가 이뤄지는 것에 화가 난 나머지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한 조사관이 자신이 추후에 관련 사항을 반드시 확인하겠다고 말하며 황 대표를 달랬다.
이날 조사가 끝난 이후에는 삼성전자 관리자 한 명이 황 대표에게 개별적으로 얘기를 나누자고 했다. 큰 회의실에 들어서자 그 삼성 직원이 황 대표에게 앞으로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10억 원을 주겠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 삼성전자에서 다른 직원들이 대처를 잘못해서 일이 이렇게 됐다면서 진작 자신이 속한 부서가 나서서 이 일을 처리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는 투로 말했다. 그는 황 대표에게 10억원을 주겠다고 하면서도 단서조항을 달았다. 기자나 사회단체 사람들은 만나지 말라고 요구했다. 황 대표는 이에 대해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공장을 떠나는 황 대표를 배웅하러 다른 직원들과 건물 밖까지 나왔고 황 대표의 택시에 은행잎이 떨어져 있자 아랫사람들을 시켜서 이를 치우게 하며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친절한 모습을 보였다.
황 대표는 당시 딸과 아내를 위한 병원비 부담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었다. 더군다나 딸의 산재 처리를 위해 쫓아다니다보니 이전처럼 밤낮으로 택시 운전에 매진하기는 힘들어 수입도 줄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황 대표는 삼성이 제시하는 거액에 흔들리지 않았다. 이미 삼성에 대한 신뢰가 바닥에 떨어진 상황이라 삼성의 회유가 가식적인 행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또한 황 대표의 마음속에는 딸의 억울함을 풀겠다는 일념뿐이라 삼성이 아무리 많은 금액을 제시해도 돈을 받는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황 대표는 삼성전자 기흥공장을 나서서 곧장 민주노총 경기본부에 있는 이종란 노무사를 만나러 갔다. 황 대표는 이종란 노무사에게 삼성전자의 기만적인 회유책에 대해 고스란히 얘기했다.

공동대책위 ‘반올림’ 발족
11월에는 드디어 공동대책위원회가 발족했다. 대책위의 발족은 이종란 노무사와 박진 활동가 등이 여러 단체가 공동으로 대처할 수 있게 노력한 결과였다. 대책위는 그달 20일 삼성전자 기흥공장 앞에서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 규명과 노동 기본권 확보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발족 기자회견을 열었다. 여기에는 노동건강연대, 다산인권센터, 민주노총 경기도본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등 20여 개 단체가 참여했다. 대책위원회는 이듬해인 2008년 2월부터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백혈병만이 아니라 다른 직업병 피해자들을 아우르고 삼성이란 기업을 넘어 반도체·전자산업 노동자들을 포괄하기 위해서였다.
발족 기자회견에서는 작은 소동이 있었다. 삼성전자 직원이 신분을 속이고 현장을 염탐하다가 대책위 사람들에게 적발됐다. 그 사람은 처음에 기자라고 둘러댔는데 해당 언론사 기자가 같은 회사 동료가 아니라고 하면서 정체가 탄로 났다.
대책위 발족 기사가 나가자 대책위로 제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발족 후 10일 만에 스무 건이 넘는 제보가 들어왔다. 이렇게 제보가 들어오기 시작하자 황 대표는 용기를 얻었고 딸의 억울한 죽음에 관한 진실을 밝히려는 의지가 한층 더 단단해질 수 있었다. 2008년 4월에는 삼성 반도체 백혈병 피해자 4명이 집단으로 산업재해를 신청했다.
<다음에 계속>
구술 황상기 반올림 대표
정리 이광호 객원기자 campin@hanmail.net
2007년 11월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 규명과 노동 기본권 확보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출범 당시 기자회견. (‘반올림’ 제공)
 

이광호 (campin@hanmail.net)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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