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 교동에 거주하는 78세의 신정자 할머니는 올해 초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체력과 사고력이 점점 약해지는 노년에 진학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할머니의 목소리에는 의욕이 가득했다.
할머니의 자택을 방문하자 팔순에 가까운 여고생은 10대 여고생 못지않게 너무도 밝게 웃으며 사람을 맞았다. 그 환한 웃음은 인생의 고난과 고비를 이겨내고 나온 값진 결과이다.
양양이 고향인 신정자 할머니는 어려서 가정환경으로 인해 학교에 오래 다니지 못했다. 할머니의 부친은 한국전쟁 당시 전사했고, 이후 새아버지를 맞았지만 가정 형편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할머니의 모친은 동생을 뱃속에 가진 채로 쉬지도 못하고 남의 밭에서 일을 하느라 바빴고, 그러한 이유로 장녀인 자신이 동생들을 챙길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는 월사금을 제때 내지 못했다고 구박하는 교사가 있었고 어린 동생들은 자신이 학교에 가면 따라와서 속을 썩이곤 했다. 의붓동생 셋을 포함해 동생이 네 명이나 됐는데 동생들은 학교로 할머니를 쫓아왔다가 배변을 해서 할머니를 난처하게 만든 적이 있다. 신정자 할머니는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어머니를 돕고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 초등학교 2학년까지만 학교에 다녔다.
글 잘 몰라 여군 입대 못해 낙심
할머니는 열여덟에 양양의 광업소에서 일을 시작했다. 광업소에서는 철광석이 컨베이어벨트 위를 지날 때 돌을 골라내는 작업을 했었다. 이 일은 할머니가 스물다섯에 결혼하기 전까지 7년 정도 계속했다. 할머니가 스무 살쯤 됐을 때에는 통장의 추천으로 여군으로 입대하려고 했었는데 글을 잘 몰라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입대를 위해 양양면사무소에 가서 집 주소를 적는데 할머니는 ‘내곡리’를 ‘내공니’라고 썼고 이를 본 면사무소 직원이 입대를 막았다. 통장의 추천을 받았을 때에 할머니는 잠시나마 군인으로 출세하는 희망을 품기도 했지만 글을 잘 몰라 입대를 못하자 낙심이 컸다.
남편은 할머니가 못 배웠다는 이유로 구박하지 않던 좋은 사람이었다. 시어머니 또한 며느리를 딸처럼 아꼈다. 신정자 할머니는 딸을 여섯 명 낳았는데 마을 사람들이 “또 딸을 낳았다”고 쑥덕거리면 시어머니는 그 사람에게 물을 퍼부어 버리며 며느리를 옹호했다. 할머니는 요즘도 그 시절 생각을 많이 하며 시집살이를 다시 한 번 해보고 싶어 한다. 할머니는 남편과의 결혼생활도 다시 하는 꿈을 꾸곤 한다.
할머니와 동갑인 남편은 광업회사에 다니다가 50대 초반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딸 둘은 결혼한 상태였지만 아직 어린 자녀들이 있던 할머니는 식당에서 일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다. 할머니는 홀로 억척스럽게 일하며 그때 학생이던 네 명의 딸들을 모두 결혼시켰다.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가 새아버지와 결혼한 것을 원망했지만 남편과의 사별 후 신정자 할머니는 비로소 모친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남편을 그리며 시작한 공부
할머니가 공부에 매진하게 된 데에는 남편을 향한 그리움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할머니는 남편을 향한 글을 많이 써보고 싶어서 글을 배우게 됐다. 할머니는 결혼 전 군대 간 남편에게 편지 한 장 쓰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남편은 세상을 떠났어도 그리움은 더 커졌고 남편을 잃은 지 몇 해 후인 50대 후반부터 한글교실에 다니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나이 들어 배워서 뭐 하겠냐”고 비아냥댔지만 할머니는 그런 말들에 굴하지 않았다. 일을 하면서 배우느라 배움의 진척이 더뎠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틈만 나면 여성회관, 노인복지센터 등에서 공부를 이어갔다.
신정자 할머니의 삶에 있어 남편에 대한 그리움은 아직도 절절해 보인다. 신정자 할머니의 방에는 커다란 결혼식 사진이 걸려 있다. 한복을 입은 신정자 할머니와 할머니의 남편은 선남선녀의 모습이다. 그 옆으로는 남편을 향한 편지가 크게 출력돼 벽을 장식하고 있다. 그 편지에는 “좋은 날은 좋아서 당신 생각 괴로울 때 괴로움에 당신 생각”이란 문구가 시선을 머물게 한다.
신정자 할머니는 백일장에서 상을 받은 적도 있다. 한글교실에서 교사로 인연을 맺은 권정남 시인이 대회 출전을 적극 권유해서 나간 것이었는데 2013년에는 고양시일산노인종합복지관이 주최한 전국어르신백일장의 산문 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했고 이듬해에는 동일 백일장에서 입선을 차지했다. 이 백일장은 신경림, 정희성 같은 쟁쟁한 문인들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해 무게감을 더한 대회라 수상의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2013년 대상작인 <얼굴>이란 글 역시 남편을 향한 편지 형식이다. 할머니는 그 글에서 공부가 좋은 취미생활이라고 밝히며 “요즘 살맛이 납니다. 이렇게 당신 얼굴 그리며 쓰는 편지 한 자 한 자가 너무 내 마음을 흐뭇하게 해 줍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신정자 할머니는 아프다가도 학교에 가는 날이면 멀쩡해진다고 한다. 강릉의 방송통신중학교에 다닐 때에 통학이 쉽지 않았지만 마음은 즐거움으로 가득했다. 방송통신고등학교에 다니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이제는 학교의 거리가 가깝지만 공부는 더 어려워졌다. 하지만 할머니는 2학기 개학을 기대하고 있다. 이런 할머니를 두고 주위 사람들은 평생 학교 다닐 운명이라고 말하고는 한다. 할머니는 올해 몸이 더 무거워졌지만 잘 버텨보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80대가 되지만 여건이 허락된다면 대학 진학도 할 생각이다. 미래를 향한 꿈을 안고서 환하게 웃는 할머니를 보고 있노라면 70대의 여고생이 80대의 대학생이 되길 응원할 수밖에 없다. 이광호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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