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 6일. 이날은 유미 씨의 수원 아주대병원 진료가 있던 날이었다. 병원에서 혈액을 채취하는 시간이 일러서 황상기 대표 내외와 딸 유미 씨는 그날 새벽 네 시 반에 집에서 나섰다. 병원에서는 치료를 받고 수액을 맞느라 평소보다는 늦은 시간인 오후 1시에 속초로 향했다. 뒷좌석에 있던 유미 씨는 횡성을 지날 때쯤 덥다고 말했고 황 대표는 창문을 아주 조금 열어뒀다. 그런데 유미 씨가 10분쯤 후에는 춥다고 해서 다시 창문을 올렸다. 잠시 후 황 대표의 아내가 뒤돌아보더니 깜짝 놀랐다. 유미 씨가 숨을 매우 거칠게 쉬고 있었다. 차를 고속도로 갓길에 세우고 놀란 마음으로 딸을 살폈다. 유미 씨는 눈이 돌아간 채로 힘들게 숨을 쉬었다. 황 대표의 아내는 딸을 부둥켜안고 딸의 이름을 부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딸은 엄마 품에 안겨 매우 고통스러워하다가 황 대표의 택시 안에서 숨을 거뒀다.
숨진 딸을 데리고 속초로 와서 영안실에 안치한 후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을 맞는데 삼성의 동료 직원들도 조문을 왔고 황 대표에게 언성을 높이던 부장도 장례식장을 찾았다. 황 대표는 울분과 답답함을 견디지 못해 장례식장 밖으로 나왔는데 부장이 따라 나와 장례를 잘 치르라면서 보상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얘기했다. 황 대표는 이미 삼성전자가 미덥지 않은 상태라 여기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만 황 대표는 당장이라도 삼성전자 기흥공장으로 가서 항의를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딸의 억울함 풀겠다 다짐
딸의 유골은 대명리조트 인근, 울산바위와 동해가 잘 보이는 언덕에 뿌렸다. 딸의 친구들과 직장동료, 그리고 삼성의 관리자들도 그곳까지 따라왔다. 유골을 뿌리는데 분노가 치밀어 삼성전자 관계자들에게 욕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마음을 삭혔고 딸의 억울함을 풀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딸을 잃은 며칠 후에 삼성전자 관리자들이 또 속초로 왔다. 그들과 장사동 횟집에서 만나 대화가 시작됐지만 금세 끝났다. 불과 며칠 전 딸의 죽음에 대한 보상을 말하던 부장이 반도체공장에서는 화학약품을 쓰지 않으며 딸의 병이 산업재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황 대표는 이번에는 욕설을 퍼부어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 대표는 그날 마음이 상해서 더 이상 택시를 몰 수 없었다.
4월 1일에는 딸에 관한 기사가 실린 <말>지 4월호가 집으로 도착했다. 기사를 읽다가 딸의 생전 사진을 보자 황 대표는 무척 괴로웠다.
기사가 나가자 황 대표를 찾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말>지 기사를 본 경기도 한 언론사에서는 <말>지 기사를 자신들이 그대로 전재하자고 제안했고 여러 신문에서 단발성 기사가 나갔다. <수원시민신문>에서는 유미 씨 사례에 대해 큰 관심을 표하고 황 대표를 수원으로 불러 동영상 녹화를 하는 등 꼼꼼하게 취재했다. 유미 씨에 대한 기사가 실린 <수원시민신문>은 황 대표와 <수원시민신문> 기자가 함께 삼성전자 기흥공장 앞에서 출근하는 삼성전자 직원들에게 배포했다. 하지만 회사 출입구에서 삼성전자 경비원들이 직원들의 손에 들린 <수원시민신문>을 압수했다.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
유미 씨 산재 신청 서류 작성에는 ‘건강한 노동세상’의 장안석 활동가가 큰 도움을 줬다. 6월 초, 황 대표와 장안석 활동가, 그리고 <수원시민신문> 기자 세 명이 함께 근로복지공단 평택지사에 가서 산업재해보상보험 유족급여를 신청했다.
6월 말 평택근로복지공단에서 황 대표에게 출석을 요구했다. 근로복지공단에 가자 담당자가 웃는 얼굴로 황 대표를 맞으며 순조롭게 이야기가 진행되는 듯했다. 담당자는 자신도 강원도 출신이라며 황 대표를 반겼다. 하지만 황 대표는 딸을 잃은 슬픔을 극복하지 못한 상황이라 담당자를 반갑게 대할 기분이 아니었다. 황 대표는 그 자리에서 유미 씨 외에도 암에 걸린 사람이 5명이 더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하며 산재 인정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다가 유미 씨 근무지 이야기가 나오자 담당자의 태도가 돌변했다. 황 대표는 딸이 3라인에서 일했다고 말했지만 담당자는 삼성전자가 보내온 서류를 보고서 유미 씨는 다른 데서 일하다가 3라인에서 세 달만 일했다고 언성을 높였다. 담당자는 삼성이라는 큰 회사가 서류를 잘못 보내올 리 없다면서 길길이 날뛰듯이 소리를 지르며 황 대표를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였다. 황 대표는 차분하게 항변했지만 도무지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황 대표는 몇 해가 지난 후 근로복지공단 평택지사에서 자신에게 고성을 내뱉던 담당자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 사람은 이후 얼마 못가 암에 걸려 죽었다고 한다.
<다음에 계속>
구술 황상기 반올림 대표
정리 이광호 객원기자 campin@hanmail.net
올해 3월 2일, 유미 씨의 유골이 뿌려진 대명리조트 인근 언덕에서 열린 유미 씨의 12주기 추모식. 이 추모식은 작년 11월 삼성전자와 반올림 간에 반도체 직업병 문제가 타결된 이후 첫 번째로 맞은 유미 씨의 제일(3월 6일)을 앞두고 치른 추모 행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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