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의 택시운전사 황상기의 살아온 이야기<11> – 병이 더 깊어진 딸

뉴스홈 > 인물

병술년 섣달그믐의 기억

등록날짜 [ 2019년08월19일 15시38분 ]

2007년 1월에는 유미 씨의 두 번째 골수이식수술이 예정돼 있었다. 유미 씨는 골수 이식을 위해 격리병실에 입원했지만 일정을 하루 남겨 두고 수술이 취소됐다. 항암치료제를 복용한 유미 씨가 속이 좋지 않아 음식을 먹으면 계속 토했고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수술이 힘들어 퇴원할 수밖에 없었다. 유미 씨는 이후에도 잘 먹지 못했고 나중에는 몸무게가 30kg 정도까지 줄었다. 유미 씨의 투병 의지는 갈수록 크게 약화됐다. 병술년 섣달그믐(2007년 2월 17일)에는 유미 씨가 어머니 앞에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황상기 대표는 딸이 그렇게 말했던 그날의 날짜를 1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황 대표가 산재 처리를 거듭 요구하자 그즈음 삼성전자에서 세 명의 직원이 속초로 찾아왔다. 그들과 집 앞 다방에서 얘기를 하는데 그들은 유미 씨의 병은 삼성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강한 어조로 되풀이했다. 황 대표가 같은 공장에서 일하다가 암에 걸린 사람이 적어도 다섯 명이나 더 있다고 말해도 그들은 합리적인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또한 그들은 유미 씨가 일한 기흥공장에서 유독한 화학약품은 쓰지 않는다는, 사실 관계에 어긋나는 주장을 고집했다. 그 사람들 중 가장 상급자인 부장은 유미 씨 이전에 병이 난 사람들에게 보상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하며 황 대표를 윽박질렀다. 그들은 거칠게 대응할 뿐 문제를 합리적으로 풀어갈 생각이 없어보였다. 마음이 더 불편한 점은 그들이 그 자리에서 딸의 상태에 대해 한 마디도 물어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황 대표는 그날 그들을 뒤로하고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황 대표는 억울한 마음에 정당과 언론사에 전화했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직접 찾아간 한 정당에서는 삼성이란 기업에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고 했다. 지역구 국회의원이 있는 당이라 적어도 지역민의 얘기를 들어줄 것이라 생각했지만 당 관계자들은 다른 곳을 찾아가보라고 할 뿐이었다. 뉴스 제보 전화번호를 보고 공영방송사에 전화했으나 3일 동안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러다가 겨우 통화가 됐는데 전화를 받은 사람이 터무니없는 소리를 했다. 공장에서 일하다가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는 서류를 삼성에서 받아오라고 했다. 전국적 규모의 노동조합과 진보정당에도 한두 번 전화했으나 이들은 나중과는 달리 당시에는 적극적으로 호응하지 못했다.
황 대표는 컴퓨터를 거의 몰랐지만 답답한 마음에 활용해 보기로 했다. 유미 씨가 가르쳐 준 기억을 더듬어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적당해 보이는 언론사 하나를 발견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월간지 <말>이었다. 이곳으로 전화를 걸어 한참동안 억울함을 호소했더니 기자 한 명이 서울에서 그날 바로 속초를 찾았다. <말>지 기자는 유미 씨에게 업무에 관해 꼼꼼하게 질문했고 작업 환경과 공장 구조를 파악했으며 황 대표의 입장을 동영상으로 찍었다. 황 대표는 이런 취재가 처음이라 카메라 앞에서 말이 잘 풀리지 않아 여러 번 다시 녹화했다. 그날 <말>지 기자는 황 대표 집에서 하룻밤 자며 황 대표와 긴 얘기를 나눴다.
<말>지의 취재가 시작된 후 유미 씨는 회사 동료들과 연락이 끊겼다. 삼성전자에서 직원들을 단속한 것으로 보였다.
<말>지 기자는 속초 취재 이후에도 황 대표에게 도움을 줬다. 기자는 황 대표에게 해당 분야 전문가인 대학교수를 소개했고 ‘건강한 노동세상’이라는 노동운동단체의 장안석 활동가도 연결해줬다.
황 대표는 산재 신청을 위해 아주대병원 산업의학과에 진료를 접수했고 병원 산재 담당 직원에게 산재 신청에 대해서도 문의했다. 그런데 담당 직원은 유미 씨의 경우 산재의 대상이 아니라면서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였다. 황 대표는 이런 상황에 크게 반응하지 않고 딸의 진료를 위해 산업의학과로 가려는데 그 직원이 갑자기 말을 바꿨다. 어찌된 영문인지 그 직원은 자신이 산재 신청에 도움을 주겠다면서 대신 유미 씨의 산업의학과 진료는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그 직원이 서류를 내밀어 유미 씨가 힘든 몸으로 두 줄 정도 직접 썼는데 그때 <말>지 기자와 장안석 활동가가 함께 병원으로 와서 만나게 됐다. 장 씨는 유미 씨가 쓴 신청서를 보더니 작성이 잘못됐다고 했고 장 씨는 유미 씨의 얘기를 듣기 위해 장소를 옮겼다. 유미 씨는 병세가 더 나빠진 상태였지만 장 씨에게 삼성전자에서 자신이 겪은 일들을 설명했다. <다음에 계속>
구술 황상기 반올림 대표
정리 이광호 객원기자 campi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