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수이식수술 후 몇 개월이 흐르는 동안 황상기 대표의 딸 유미 씨의 상태는 호전됐다. 2006년 9월, 유미 씨와 같은 라인에서 일하던 동료들이 속초로 찾아왔을 때에는 유미 씨가 외출을 해서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에는 삼성전자의 인사과장과 또 다른 관리자가 황 대표의 집을 찾았다. 그 사람들과 가족들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과장이 황 대표에게 독대를 청했다. 과장은 유미 씨의 휴직 기간이 다됐다며 사표를 써야 한다고 했고 회사에 바라는 것이 있으면 얘기하라고 했다. 황 대표는 딸이 삼성전자 기흥공장에서 일하다가 암에 걸린 것은 산업재해로 보인다면서 산재 처리를 해달라고 했다. 이에 삼성전자의 과장은 대뜸 이렇게 반응했다.
“아버님이 삼성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당황한 황 대표는 그 자리에서 삼성을 어떻게 이기겠냐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장은 산재 처리 대신 다른 것을 얘기하라고 말했다. 과장이 산재 처리를 거부하자 황 대표는 유미 씨의 치료에 들어간 병원비와 경비를 해결해 달라고 요구했다. 황 대표는 그때까지 딸의 치료를 위해 수술비와 교통비 등 총 8,000만 원 넘게 들었는데 이 중에서 3,000만 원 정도는 사내 모금과 보험 등으로 해결했고 나머지는 회사에서 지급해 주길 바랐다. 삼성의 과장은 그 자리에서 이를 수용했고 황 대표는 유미 씨를 불러 사직서를 쓰게 했다. 그리고 치료 경비를 준다는 말에 황 대표는 고마운 마음이 들어 시가 수십만 원이 되는 큰 송이버섯 두 송이를 과장에게 선물로 줬다. 송이버섯을 잘 따는 친구에게 전화해 급하게 마련한 것이었다.
그러나 황 대표의 다소 가벼워진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며칠이 지나자 유미 씨의 눈빛이 희미해져 갔다. 수원 아주대병원에 가보니 백혈병이 재발한 상태였다. 이를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온 유미 씨는 채 하루도 안 돼 아주대병원으로 다시 가야만 했다. 진료를 마치고 집에 도착해 한숨 자고 일어난 유미 씨는 고열에 시달렸고 병원에서 지급한 강력한 해열제를 먹어도 잠깐 괜찮아질 뿐 10분 만에 체온이 다시 올랐다. 황 대표는 새벽에 택시를 몰고 수원으로 향했고 병원에서도 딸의 고열은 지속돼 열을 잡는 데에만 한 달 가까이 걸렸다.
삼성과 싸우기로 결심하다
몇 주 후, 유미 씨의 치료비를 약속하며 사표를 받아간 삼성전자의 과장이 병원을 찾았다. 과장은 병원 1층 로비로 황 대표를 불렀고 100만 원 짜리 수표 다섯 장을 내밀었다. 과장은 황 대표에게 회사에 돈이 이것밖에 없으니 이로써 일을 해결하자고 말했다. 황 대표는 딸의 재발로 심난한 상황에서 약속을 뒤집은 과장의 말을 들으니 분노가 치밀었다. 그러나 돈이 궁한 입장에서 황 대표는 그 돈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 일로 화가 난 황 대표는 이후 산재 처리를 위해 삼성전자에 전화했지만 회사에서는 딸의 병은 삼성과는 관계없는 것이라 말하며 황 대표의 화를 부채질했다.
유미 씨는 병이 재발한 이후 회사 동료들과 통화하다가 당시 회사 동료 중에 암에 걸린 사람이 자신 말고도 다섯 명이 더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황 대표는 딸의 병이 화학물질과 관련 있을 거라는 의심을 더욱 강하게 하게 됐다.
황 대표는 딸의 재발 이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통장과 함께 동사무소에 들른 적이 있다. 딸 간호로 힘든 상황에서 암환자에 대한 공적인 지원금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과연 그러한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때 동사무소에서 대면한 사회복지 담당 여자 공무원이 한 말은 황 대표의 가슴을 후벼 팠다. 그 사람은 황 대표에게 딸이 어차피 죽을 건데 돈을 받아서 뭐하냔 식으로 조롱하듯 말을 내뱉었다. 매우 무례한 말이어도 황 대표는 참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끓어오르는 화를 잠재우기 힘들었다. 그날은 금요일이었는데 토요일과 일요일을 거치는 동안 황 대표는 몹시도 괴로웠고 월요일 오전 9시에 동사무소가 업무를 개시할 때 찾아가서 그 공무원에게 따졌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고성이 나오자 그 공무원은 당황했고 조용한 곳으로 장소를 옮겨 황 대표에게 사과했다.
황 대표는 딸의 발병 이후 집을 짓기 위해 모아 둔 돈을 다 썼고 일도 제대로 못 했으며, 딸의 간호를 위해 장거리를 오가다 보니 막내아들의 공부를 챙기기도 힘들었다. 손녀의 병을 걱정하며 돌아가신 모친을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팠다. 이런 상황에서 황 대표는 점차 삼성에 속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딸을 위해 삼성전자와 싸우기로 마음먹었다. 그때가 2006년 연말이었다. 10년도 훨씬 넘게 이어질 싸움은 그렇게 시작됐다.
<다음에 계속>
구술 황상기 반올림 대표
정리 이광호 객원기자 campi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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