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 여성에게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전 대구에 사는 조용분입니다!”
모란꽃 피고 지고를 반복한 유랑의 47년 세월인가. 그녀는 학생 중 질문도 많이 했고 유난히 오지랖이 넓고 활발하여 기억이 떠올랐다. 저녁 6시에 세 분 선생님과 네 명의 제자가 필자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모이기로 했다는 것이다. 두 분 선생님이 도착하자 대구에서 온 용분이는 강의중 선생님을 보곤 “선생님…” 하며 두 손을 꼭 잡고 가슴 벅찬 눈물을 보인다. “용분이 너 지금 우는 거야.” 강 선생님의 거북하지 않은 말투는 필자도 눈물을 훔치게 했다. 어려웠던 지난 학창시절에 자신들을 지켜주고 정신적으로 의지했던 스승에 대한 고마움에 눈물샘이 폭발한 것일까.
애끊는 세월을 등짐하고 살아온 그들은 이미 60세가 훌쩍 넘어 이시대의 부끄럽지 않은 당당한 할머니로 다가왔다. 자녀들을 이미 출가시키고 손자 손녀를 둔 비교적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속초에 사는 정일이, 강릉에 사는 남순이와 정희 그리고 서예가로 활동하는 대구에 사는 조용분이 제자로 함께했다.
불확실한 시대, 구름 따라 아득히 흘러간 세월, 모진 풍파에서도 버티고 견디면서 빗나가지 않고 열심히 살아온 제자들. 이마에는 주름 한골 없이 아름답게 늙어가는 그들의 흔적에서 한없는 고마움을 느끼는 순간이다.
너무 가난하였기에 수업시간은 열정으로 가득했고 존경과 사랑이 넘치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기억한다. 지금에 와서도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전혀 흔들림이 없는 듯하다.
한 발자국씩 걸어 온 세파를 되돌아보며 잊혀져간 친구들의 이름과 학과선생님의 분필가루 날리는 열정적인 강의는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그리움으로 온통 채워졌다. 남달리 이쁜 남순이는 주판 살 돈이 없어 주산시간이면 교실 문을 몰래 빠져나가 유리창 밑에서 그 시간을 지켜본 서러운 시간을 잊지 못해 “정말 부끄러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어요. 그래서 악착같이 노력하여 주산 3급 자격증을 땄어요”라며 서러웠던 세월을 자랑삼아 꺼내 놨다. “주산 3급 때문에 살아가는데 도움이 됐고 좋은 사람만나 결혼도 하는 인연이 되었다”고 한다. 순간 필자에게 두루 살피지 못했다는 미안한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랬었구나….”
그들은 내세울 학부는 못되지만 나라가 빈곤한 격동의 시대에서 끼니가 없어도 허둥지둥 하지 않고 갈등과 번민을 홀로 극복하며 정직하게 그리고 열심히 살아온 제자임에 틀림없다.
1967년 1월 1일 속초 교동성당 초대 오브라이언 안토니오 신부님께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정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못하는 소년소녀들을 위해 이곳에 학교를 세워 배움의 터전을 마련해 줘야 된다는 신념에서 춘천교주님에게 허락받아 1968년 3월 12일 개교한 것이 교동천주교회 ‘안토니오’ 중학원이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강의중 선생님과 최양일 선생님께서 학생모집 등 헌신적으로 수고해주신 덕분에 손색없는 체계적인 작은 학문의 전당이 되었다. 필자는 고등학교 학생 신분에 주산 공인 5단 자격으로 가르치게 되었다. 중고등학교 현직 교사인 최진철 선생님 비롯해 참여해 주신 선생님들이 학과전담 자원봉사로 나서 쉽게 잊을 수 없는 인간적인 추억을 만들어 줬다.
1980년 9월 속초 교동천주교회 안토니오 학원은 정부의 의무교육 환경이 좋아지면서 12년 만에 자진 폐교했다. 그러나 본원을 나선 그들의 그리움은 두고두고 멈추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밤이 깊어가고 이제 곧 헤어질 시간이다. “47년이라는 지난 세월에서도 잊지 않고 찾아준 용분이, 정일이, 남순이, 정희의 마음에 감동했고 무엇보다 정말 잘 살아줘서 고맙고 감사하다. 오늘 음식값은 선생님들이 계산하게끔 기회를 달라”고 간청했다. 제자들은 스승의 간절한 취지를 받아드렸다. 용분이는 선뜻 “선생님! 답례로서 제가 노래 한곡 들려드리겠습니다.” 즉석에서 일어나 무반주에 흥겨운 율동으로 민요를 열창했다.
이기가 넘치고 삼독오욕에 찌들어 사는 세속에서 정(情)이 메말라 가는 야박한 인심과 잔인한 세상에서도 흔들림 없이 소박하고 정겨운 인성이 신뢰와 희망을 만들어 가는 그들이 진정 희생 없는 종교보다 아름답다.
이대길
전 속초신협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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