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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 속초향토사 / 도리원 출신 최춘옥 할머니의 기억<6>
북한 치하에서 한국전쟁, 폭격으로 부친 잃어
등록날짜 [ 2019년07월08일 09시35분 ]

해방 후 38선 이북에 들어선 인민공화국 체제에서 살던 최춘옥 할머니는 한국전쟁 중에 도리원 마을에서 폭격으로 부친을 잃었다. 북한체제였던 속초에 살던 원주민들에게도 한국전쟁은 큰 상처를 남겨줬다.

“인공 시절, 이목리, 청대리, 우리동네, 척산 등 5개 동네가 선거를 하면, 우리 동네가 선거장이 됐어. 선거를 하면 소나무를 꺾어다가 크게 솔문을 세웠어. 인공 때 내가 살던 도리원 마을은 인물들이 많았어. 인공 때 속초에 면에서 운영하는 ‘백화점 소비조합’이라는 가게가 둘 있어 물건을 사고팔았는데, 그 원장을 우리 동네 사람이 했지. 우리 동네 똑똑한 사람들은 전쟁 중에 북으로 많이 들어갔어.
전쟁 나던 그 무렵 우리 외삼촌이 속초 농민위원장이었어. 내가 사무실에 가서 전화까지 받아주고 했지. 외삼촌은 일구(영랑동)에 살았는데 전쟁 중에 북으로 갔어. 지금 경동대 자리에 살던 군 농민위원장은 국군이 들어온 후에 용천 다리 밑에 끌려가 처형당했어. 그때 사람들이 많이 죽었어.
우리 아버지도 전쟁 중에 돌아가셨어. 1.4후퇴 후인 1951년 정월에 비행기 폭격에 돌아가셨어. 전쟁 중에 비행기와 함포 폭격이 심해 굴을 파고 들어가 살았어. 아이들은 먼저 굴에 피신시키고 어머니와 아버지도 집에서 늦게 피신하려고 문턱을 나서는데 잘못 떨어진 포탄에 맞아 돌아가셨지. 그때 인민군들이 있었던 솔밭에 포탄을 퍼붓는다는 게 잘못 떨어진 거야. 마흔 넷에 돌아가셨는데 자식들은 모두 5남매였어. 그 바람에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어. 전쟁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토굴에서 살다보니 장질부사에 걸려 앓기도 했고 죽기도 했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해 2,3월에 동네 친구네 집에 놀러 갔더니 마침 친구가 아버지를 따라 북으로 피난을 간다는 거야. 그래서 친구를 배웅하고 집에 돌아왔더니 어머니가 “외삼촌이 찾아와서는 너 데리고 북으로 가려고 했는데, 네가 없어서 외삼촌만 북으로 갔다”고 말하시는 거야. 딱 3분이 늦어서 피난을 못 간 거지.
우리 사촌 오빠는 인공체제가 싫다고 전쟁 전에 월남을 했어. 그래서 사촌 오빠한테서 무슨 연락이라도 왔나하고 사람들이 매일 오빠네 집에 와서 보초를 섰어. 사촌 오빠는 전쟁 중에 아군 들어올 때 같이 들어와서는 도리원에서 리장을 17년간을 했어. 그리고 속초농협이 생기면서 농협장을 7년간 했지.”

한국전쟁 당시 38선 이북이었던 양양과 속초는 38선 이남의 대한민국 다른 지역과는 다른 역사적 경험을 안고 있다. 한국전쟁을 겪은 속초지역의 원주민들 중 상당수는 북으로 피난을 갔고, 수복 이후에 북한체제를 피해 내려온 많은 함경도 실향민들이 속초지역에 정착했다. 그래서 속초에서는 월남 실향민의 아픔은 많이 이야기되고 있지만, 다른 체제에서 전쟁을 겪은 속초 원주민의 이야기는 거의 없다. 분단이 고착화된 시절, 다른 체제에서의 전쟁 경험담을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금기였다.

“우리 옆 마을인 노리 마을에서는 이상봉이라는 사람이 유명해. 이상봉이라는 분은 일정 때 우리 동네 리장도 했어. 그래서 칼을 찬 일본 순사들이 많이 찾아왔었지. 이상봉씨는 아들 2명과 딸 1명을 모두 일본 대학에 보냈어. 양양에서 아들딸 3명을 일본 대학에 보낸 건 이상봉씨가 유일해서 양양군수가 상을 줬다고 했어. 일정 때 대학 다니는 이상봉씨 딸이 방학이 되어 집에 온 걸 봤는데,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어. 그렇지만 우리집 형편에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지. 나는 해방 후에 뒤늦게 영랑학교를 다녔지만, 집안 형편 때문에 오래 다니지도 못하고 그만두었어.
한국전쟁 중에 속초가 수복되면서 면에서 읍으로 되면서 이상봉씨가 읍장을 했어. 작은 아들 이홍영은 서울에서 한국은행 지점장까지 했지. 자유당 시절 이승만 정권 말기에 국회의원선거에도 나왔는데 당선은 안됐어. 형 이원영은 일정 때 와세다대학 법대를 나왔어. 인공 당시 강원도청이 원산에 있었는데, 그곳 원산에서 판사를 했어. 읍장을 한 아버지 힘도 있고 해서 전쟁 중에 죽지 않고 여기 속초에서 살았어. 그렇게 잘 배웠지만 결국 사회에서 매장되어 살다가 죽었어.”

2006년 속초시와 속초문화원이 발간한 <속초시사> 인물편에는 이상봉씨가 “1950년 10월 3일 이 지역이 수복되자 군당국의 요청으로 면장으로서 주민선무와 행정 수습에 노력하였다”고 했다. 같은 책에는 이상봉씨의 작은 아들로 거명한 이홍영씨(39세)가 1960년 제5대 국회의원선거 때 속초·양양지역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4,198표 득표로 낙선했으며.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하고 한일은행 영업부차장을 지냈다고 했다. 인공 때 원산에서 판사를 했다는 이상봉씨의 큰 아들 이원영씨는 전쟁 후 수복지역 속초에 머물렀다고 하는데, 그의 행적은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한국전쟁 중에 아군이 들어와서는 지금의 우체국 건너편 공설운동장 뒤에 LST선을 댔어. 아군 들어와서 그 이듬해 내가 삼영회사에서 6개월간 일하면서 군수품을 실어 나르느라 LST선에도 들어가 봤지. 내가 열아홉살 때야. 그때는 군부대가 간성까지 들어가 있을 때였어. 그러다가 거진까지 들어갔지. 수송물자 중에는 기름 드럼통이 제일 많았어. 그걸 굴려서 쌓았지. LST선에 들어가는 건 좋은데 기름 드럼통 나르는 건 정말 싫었어.
제일극장 뒤에 3층 식당배가 들어와 있었어. 미군들이 먹는 식당이야. 거기서 맛있는 냄새가 나. 미군들이 바다에 빈 드럼통을 띄워서 다리를 놓아서 식당배에 가서 먹고 오는 거야.”

최춘옥할머니가 이야기한 ‘삼영회사’는 ‘상호운수주식회사’인 것으로 보인다. ‘상호운수주식회사’는 한국전쟁 중에 속초 해안 4곳의 부두에서 미군 군수물자를 하역하고 운송하는 일을 맡았는데, 보통 500~600명의 노무자가 일했다고 한다.

엄경선 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최춘옥 할머니가 살던 속초시 노학동 도리원마을.
 

설악신문 (soraknews@soraknews.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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