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춘옥 할머니는 일제강점기가 끝나갈 무렵 속초의 재력가와 지역 내 관공서의 위치를 비교적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우리 아버지는 낙천양조장하던 김용기씨, 고동환씨랑 다 같은 나이였어. 아버지들이 말씀하시기를 옛날에 강릉에는 배다리 이통천이가 큰 부자였고, 양양에는 윤귀범(귀봉?), 강현에는 이관수, 속초에는 고동환, 토성에는 김연수가 부자라고 했어. 김연수는 내가 지금 살고 있는 토성면 청간 리 동네에 살았어. 김연수는 속초에서 일본사람하고 철공장을 같이 했어. 그 양반 속초집이 바로 지금의 속초우체국 주차장 자리야. 김용기씨는 속초 1구(영랑동)에서 목재소를 크게 했어. 1구 시장 근처 조선소 아래였지. 그 자리에 암컷 수컷 곰을 키웠어.
일정 때 주재소는 동명동 옛날 경찰서 자리에 있었어. 해방 후 인공 때도 그 자리가 내무서(경찰서) 자리였지. 수복탑 근처에는 포목상들이 나란히 있었어. 옛날에는 1구(영랑동)가 컸어. 시장도 있었지. 당시 읍사무소가 영랑동 동현아파트 조금 올라가서 있었는데, 해방되고 나서 영랑학교가 읍사무소 자리로 옮겨갔어.
일본사람들은 1구 쪽에 많이 살았고, 지금 중앙시장 남쪽 신작로 옆에도 살았어. 일정 때나 인공 때 지금의 우체국과 구수로 축항 사이에 큰 공설운동장이 있었어. 운동장에 그네도 있었지. 여기서 운동을 하다가 점심 때가 되면 지금의 시청자리인 고동환씨 집에 가서 밥을 먹었어. 고동환씨 집은 우물 정자 모양으로 지은 집인데, 큰 우물이 있어 사람들이 다 거기 가서 밥을 먹었어. 해방 후 인공이 들어서면서 고동환씨 집도, 김연수씨 철공장도 다 몰수당했는데, 고동환씨는 그후 월남해 주문진으로 갔다고 그래.
일정 때 우리 마을에서도 헤따이상(일본군인)으로 나갔어. 똑똑하고 인물이 잘난 사람들이 군에 나갔다고 했어. 도리원에서도 ‘이호식’이라는 사람이 군인으로 나갔고 이목리에서도 한 명 나갔어. 마을에서 일본군인으로 나가는 걸 일본 국기를 흔들고 일본 군가를 부르면서 환송식을 크게 해줬어. 도리원 마을 입구 삼거리 넓은 공터에서 환송식을 했지.“
최춘옥 할머니의 해방에 대한 기억은 속초 간장공장 탱크에 빠져 자살한 일본인에 대한 이야기로 남아있다.
“일제강점기 말쯤에 속초에 기꼬만간장이라고 엄청나게 큰 간장공장이 있었어. 어디에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기꼬만간장이라고 일본에서도 맛있다는 간장인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사람이 속초에 와서 공장을 했어. 해방되고 나서 사람들이 그 간장을 퍼서 구루마(수레)에 실어 집집마다 다 나눠줬지. 그런데 간장탱크에서 간장을 푸다보니 뭐가 걸리더래. 봤더니 일본여자가 얼굴을 폭 싸매고 앞치마에 돌을 매달고는 간장탱크에 빠져 죽었다고 해. 해방되고 나서 일본 사람들은 서러움을 아주 많이 받고 갔지.”
해방 후 38선 이북인 속초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지금의 청초교인 쌍다리가 인공 당시에 콘크리트 다리로 처음 만들어졌으며, 당시에도 ‘줄배’라고 부르는 갯배가 운행하고 있었다.
“지금의 황소광장 자리 남쪽으로 배를 대는 곳 근처에 바위가 큰 게 있었어. 용바위라고 했어. 황소광장 북쪽에는 집들이 조금 있었고, 지금의 중앙시장은 당시 논이었어.
인공 때도 갯배가 있었어. 어머니 따라 바다나물하러 갈 때 갯배를 타고 갔어. 그때 갯배는 리어카 하나 정도 실어 끌고 갈 정도 크기였어. 우리는 그때 갯배를 ‘줄배’라고 했어. 갯배 선착장에 장대를 세워놓고는 와이어(쇠줄)을 감아놓았어. 그리고 갯배 바닥에 얹힌 줄을 갈고리로 끌고 갔지. 지금이랑 비슷해. 뱃사공도 없고 갯배에 탄 사람이 줄을 당겨 건너편으로 넘어갔어. 그때는 배가 한 대 뿐이라서 배가 건너편에 있으면 배를 다시 끌어 와서 타고 넘어 가야했어.
지금의 쌍다리(청초교)는 일정 때는 없었어. 일정 때 청초호를 돌아가는 철로는 놨지만, 차가 다니는 길은 없었고 그냥 사람만 간신히 넘어 다니는 다리가 있었지. 해방되고 2년 있다가 콘크리트 다리가 만들어졌어. 부월리 청대리 등 인근 마을사람들이 지게나 머리로 시멘트를 져 날랐어. 주민들은 한 달에 몇 번 나가서 일을 했어. 우리 아버지도 그때 나가서 일했어.
인공 때 초등학교는 영랑, 대포 두 개가 있었고. 지금의 이마트 근처에 남자중학교가 있었어. 여자중학교도 하나 있었는데 어디 있었는지 몰라. 일정 때 도문에 관립학교라는 학교가 있었어. 2학년인지 3학년을 마치면 졸업이야. 돈이 없어 영랑학교에 못가는 사람은 싸리재를 넘어 도문의 관립학교에 다녔지. 중도문쯤에 있었어. 우리 동네 처녀들도 몇 다녔어.“
황소광장 남쪽으로 아주 큰 용바위가 있었다는 이야기와 관련해 1926년 발행한 도천면 <면세일반>에는 청초호 북쪽에 ‘용암’이라는 바위가 있다고 나온다. 청초호 북쪽면 약 7, 8리 되는 호숫가에 우뚝 솟은 것을 용암이라고 부르는데, 시인과 묵객들이 이곳에서 술을 마시며 놀았고, 구한말 남궁억 양양군수가 석가탄신일에 낙화를 즐겼다고 한다. 이 ‘용암’이 바로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용바위’로 지금의 황소광장 남쪽에 위치한 걸로 추정된다.
할머니의 기억 속에는 해방 이후 북조선에 내려온 소련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아주 선명하다. 소련 아이들과 함께 불렀다는 노래 가사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해방 후에 다케나카 통조림 공장이 있었던 곳에 노스케(소련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살았어. 어떤 사람이 다케나카 공장 일대에 사는 소련 사람들한테 가서 농사지은 배를 팔았는데, 배값으로 함지에다 빵을 담아주더래. 노스케빵은 흘래바리빵이라고 했는데, 빵 맛도 없고 희한하게 만들었어. 배값으로 빵을 받고 나서는 그 다음부터 노스케한테 장사하러 가지 않았다고 해.
소련 군인들이 철수할 때는 배웅도 했어. 속초역전에서 환송식을 했는데, 소련 군인들이 그렇게 많았어. 양양에서 기차를 타고 철수하는데, 기차가 며칠을 실어 날랐어. 우리 외가가 속초 1구에 있어서 외사촌들이랑 같이 소련 애들하고도 손잡고 놀았어. 그때 이런 노래도 불렀지.“
소련나라 동무야 어여쁜 동무야 / 엄마아빠 따라서 고향에 간다지 / 손목잡고 놀던 정 가이없구나(가엽구나) / 잘가거라 동무야
엄경선 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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