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북어부 간첩조작사건의 피해자 김성학 씨(70). 그는 최근 속초 공설운동장오거리 인근에 작은 가게를 열었다. 간판에 ‘전자제품 전문 수리센터’라고 적혀 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니 한 노신사가 작업 중이다. 출입문 안쪽에는 커다란 설악산 풍경사진이 손님을 맞이하고 가게 안에서는 음악이 웅장하게 울려 퍼진다. 입구에서 보면 노신사는 반대쪽 벽을 향해 돌아 앉아 일하는 중이라 누군가 왔는데도 알아채지 못했는지 한참을 뒤돌아보지 않는다. “사장님” 하고 몇 번 부르자 그제야 작업을 정리하며 서서히 고개를 돌린다. 하얀 재킷을 입은 노신사의 움직임과 표정은 매우 진중하다. 장비 수리를 위해 켜놓은 밝은 불빛이 후광으로 작용해서 뒤돌아선 그의 인상을 한층 더 강하게 한다.
속초 청호동이 고향인 김성학 사장은 스무 살에 서울 종로에서 전기 관련 전문학원에 다녔고 교육 수료 후 그곳에서 조교 생활을 했다. 그는 당시 학원을 다니며 요즘의 반도체에 해당하는 진공관에 대해 배웠는데, 이것이 탄탄한 기초실력이 돼 그를 여전히 현역의 전문가로 살아가게 한다. ‘전자제품 전문 수리센터’에서는 텔레비전을 비롯해 전기밥솥, 세탁기 등 웬만한 가전제품 수리가 가능할 뿐 아니라 오래된 오디오 장비도 고칠 수 있다. 그의 가게에는 앰프, 스피커, 오디오믹서 등 주로 음향장비가 눈에 많이 띈다. 가게에 도착했을 때에 그가 수리하고 있던 것도 앰프였다. 특별한 주문을 받아 개조했다는 앰프에는 진공관이 멋스럽게 장착돼 있어 근사한 인테리어 소품처럼 보인다.
노신사는 낮은 어조로 차분하게 얘기를 이어가다 아픈 과거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눈시울을 붉히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갑자기 말이 빨라지고 언성도 높아졌다. 1950년생인 김 사장은 한국전쟁의 고통을 직접 겪었다고 할 순 없지만 전쟁으로 성립된 냉전체제의 무시무시한 압력에 짓눌린 채로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는 1971년 속초 중앙동에서 자신이 일하던 전파사를 인수하려고 했는데 돈이 부족해 이를 보충하려고 오징어잡이 배를 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신만의 사업을 꿈꾸던 20대 초반의 청년은 납북어부가 됐고 이후 그의 인생은 고문과 후유증, 정부의 감시와 사업 실패로 이어졌다. 행복한 가정, 우정 어린 친구 관계, 건실한 사회생활은 그에겐 너무 멀리 있는 삶이었다. 군사독재정권의 하수인 이근안과 그의 수족들은 그의 몸과 마음, 그리고 삶을 짓이겨버렸다.
30대 젊은이는 이런 삶을 끝내기 위해 목발을 짚고 설악산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지친 상태로 설악산에서 밤을 보낸 후 오히려 생명의 기운을 느꼈고 누더기가 돼버린 육체와 정신, 그리고 인생을 다시 부여잡았다. 그는 자신을 살린 설악산을 찍는 사진작가가 됐고 이후 끊임없이 몰아치는 거친 파도 같은 고비를 넘어오며 어느새 노년을 맞았다.
“조금만 손보면 되는데 그냥 버리는 것이 아깝잖아요. 그래서 시작했죠.”
디지털 음원이 보편화된 요즘, 낡았지만 여전히 좋은 오디오가 버려지는 것이 오디오 마니아 입장에서는 아쉬운 일이다. 오디오를 고치려고 해도 수리점을 찾기 힘든 상황에서 김성학 사장은 앞으로 자신과 같은 취미를 가진 이들의 고민을 해결하고자 한다.
김 사장은 아직 가게의 폐점 시간을 따로 정하지 않았다. 일이 있으면 가게에 늦게까지 남아 작업에 몰두할 생각이다. 그런 까닭에 앞으로 어둑한 시간에 공설운동장 오거리 한쪽 어귀에서 잔잔한 음악이 심심찮게 흘러나올 것이다. 그 음악은 한국현대사의 고통을 이겨낸 한 노신사의 손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소리이다.
이광호 객원기자 campin@hanmail.net
최근 속초 공설운동장오거리 인근에 작은 가게를 연 납북어부 간첩조작사건의 피해자 김성학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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