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오월은 늘 뜨거웠다. 오늘처럼 갑작스럽게 초여름 날씨가 되어서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고등학교 때까지 학교에서 공부만 하다가 입학한 대학의 오월은 기대했던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축제가 펼쳐져야할 오월은 여러 글귀가 씌어 진 검은색 만장이 캠퍼스에 온통 펼쳐져 있고 하루가 멀다하게 벌어지는 시위와 진압작전들로 인해 최루탄 연기와 파편들, 불에 타다만 나무들이 캠퍼스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20대 초중반, 그렇게 인생의 황금 같은 시간들을 강의실이 아닌 햇볕 내리쬐는 아스팔트 위에서 햇볕보다 더 뜨거운 열정을 불태우곤 했었다. 그 후 나의 삶은 많은 이들이 선택하는 보편적인 넓은 길로 향했고, 나이가 듦에 따라 자연스럽게 20대 때의 정의감과 열정도 시나브로 사위어갔었다.
그렇게 현실에 순응하며 지극히 소시민적인 삶을 살아가던 내게, 남아 있던 작은 열정의 불씨를 지펴준 사람이 나타났었다. 고 노무현 대통령. 열혈 지지자도 아니었고 어떤 정치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추구하는 이상,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 등이 너무 마음에 와 닿았었다.
그는 일반적인 정치인들과는 전혀 다른 정치문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정치자금을 모으고 세를 규합하며 자신의 영달을 위해 움직이는 일반적인 정치인들과는 많이 달랐다. 지극히 서민적이었으며 막대한 자금력이나 조직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대통령직에 도전했고 거대한 반대 정치세력과 언론 등의 무시무시한 카르텔에 맞서 싸우며 결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 배경에는 그 어떤 정치인들보다 뜨거운 순수한 열정이 있었으며 지역주의 타파에 온 몸을 던져온 바보스러울 정도의 그의 원칙과 기치가 많은 사람들에게 동의를 얻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당선은, 이런 저런 모임과 조직을 통해 선출직에 당선되자마자 바로 자신만의 사익을 추구하던 숱한 정치인들에게 환멸을 느껴왔던 무수한 시민들의 무언의 항의가 아니었을까 생각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대통령이 되고 나서 그의 인기는 이전과는 전혀 달라졌었다.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문제들을 대통령이 신이 아닌 이상 다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일 텐데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다 자신들의 이익이 관철되기를 원했다. 안되면 모든 게 다 그의 탓이었다. 비가와도 햇볕이 내리쬐어도 시내에 차가 막혀도 심지어 내가 감기에 걸려도 다 그의 탓이었다. ‘~~해도 다 노무현 탓이다’라는 프레임은 실제로 많은 이들에게 먹혀들어갔고 고졸 대통령, 비주류였던 대통령을 조롱하는 방편으로 이용당했다. 또한 멀쩡하던 경제를 들먹이며 ‘경포대(경제를 포기한 대통령)’라고 조롱하고 겉으로만 뻔지르르하게 보이는 외교를 지양하고 할 말은 하고 협의를 통해 양보해야 할 것은 양보하는 게 외교일 텐데, 미국에 가서 당당히 국익을 관철시키려 노력할 때도 일본에 가서 일왕과 악수할 때 꼿꼿이 고개 들고 악수해도 이런저런 꼬투리를 잡아 ‘등신외교’라고 폄훼했었다. 퇴임 후 기거할 사저를 지을 때도 ‘아방궁’을 짓는다고 음해하기도 했었다.
이제 그가 서거한 지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강산도 변한다는 시간이 지난 후에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그의 진정한 가치를 이해하고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이상에 동의하고 또 동참하고 있는 듯하다. 그가 대통령 재임 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부시의 10주년 추도식 참석과 봉하마을로 향하는 각양각색의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하게 된다.
방대한 독서량을 통한 적확한 역사인식을 보여주는 그의 독도관련 연설 동영상을 몇 번이고 재생해서 보았다. 그의 진가가 여지없이 드러나는 명연설이다. 무릇 한 국가를 책임지고 이끌어가야 할 지도자라면 이 정도의 역사인식과 통찰력쯤은 갖추어야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개 사인에게 시시콜콜 지시받던 후임 대통령의 모습이 오버랩 되기도 했다. 외로웠지만 당당했고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더없이 다정했던 선구자. 돌이켜보면 그는 우리에게 과분한 축복이었다.
전형배
데일리F&C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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