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을 위한 책이라고 하면 많은 이들이 점자책이나 오디오북을 떠올린다.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니다. 속초고등학교 출신 함의영 씨가 대표로 있는 피치마켓에서는 발달장애인을 위한 다양한 책을 출판하고 있다.
피치마켓은 ‘느린 학습자’들의 문해력 신장을 위해 서울에서 설립된 비영리기관이다. ‘느린 학습자’란 발달장애인, 그리고 발달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에 있는 지적 능력을 지닌 이들을 이르는 말이다. 장애 등록이 되지 않아 법적으로 장애인은 아니지만 학습에 큰 애로가 있는 이들을 발달장애인과 아울러서 지칭하는 표현이다. 피치마켓은 ‘물건에 대한 정보가 평등한 시장’을 뜻하는데, 함 대표는 발달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습득하는 정보가 평등한 사회를 만들자는 생각에서 기관명을 피치마켓으로 정했다.
피치마켓의 주된 사업은 두 가지이다. ‘느린 학습자’들을 위한 도서 발간과 독서모임 운영이다. 피치마켓은 2015년에 느린 학습자를 위한 첫 번째 책을 낸 이후 지금까지 40권을 발간했다.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같은 문학작품을 비롯해 노동법 해설서, 재난대응 설명서, 선거공약 자료집, 건강·역사 서적 등 분야도 다채롭다. 이렇게 펴낸 책으로 학교, 복지관, 도서관에서 느린 학습자들과 함께 독서모임을 진행하며 그들의 문해력 향상을 위해 노력 중이다.
피치마켓의 제안으로 시작하게 된 서울시 사업도 있다. 현재 서울에서는 ‘시끄러운 도서관’의 시범 운영을 앞두고 있다. ‘시끄러운 도서관’은 느린 학습자도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이다. 발달장애인들은 갑자기 소리를 지르거나 예상하지 못한 행동으로 소음을 발생시킬 가능성이 높아 도서관에 가기가 쉽지 않은데 ‘시끄러운 도서관’에서는 책을 읽다가 소음을 내도 괜찮다. 함 대표는 자신의 피치마켓 경험을 바탕으로 서울시에 이 사업을 제안했고 5월부터 송파구, 은평구 등 서울의 여섯 개 구에서 순차적으로 시범 운영된다.
쉬운 글 향한 문제의식
피치마켓은 2014년에 시작된 한 모임에서 비롯됐다. 당시 유엔환경계획 한국위원회에서 기획팀장으로 일하던 함 대표는 글쓰기 모임을 시작했다. 모임에는 글쓰기로 공익적인 일을 해보려는 이들이 참여했고 글을 쉽게 쓰기 위한 학습을 진행했다.
글을 쉽게 쓰려는 그의 문제의식은 대학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함 대표의 대학 전공은 법학인데 그는 법학 서적이 어렵게 쓰인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그는 말과 글을 어렵게 하는 것은 한 인간이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방식이자 나아가 사회적으로는 기득권을 유지하는 수단이라 생각했다. 그는 쉽게 읽힌다고 해서 가치 없는 글은 아니며 쉬운 글이 얼마든지 깊이 있는 사고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봤다. 이런 생각에서 함 대표는 결국 고시공부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그의 문제의식은 대학 졸업 후 사회생활을 하면서 잊히는 듯했다.
유엔환경계획 퇴사를 앞두고 진행한 2014년 모임에서 그는 잊고 지내던 문제의식을 다시 끄집어냈다. 모임 참가자 중에 발달장애인 동생을 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그 동생도 이해할 정도의 쉬운 글을 써보자고 제안했다.
함 대표의 이런 생각은 책을 만드는 데까지 나아갔다. 책의 감수 과정에는 모임 참가자의 발달장애인 동생을 비롯해 다른 발달장애인들이 몇 명 더 참여했다. 하지만 이 책은 큰 호응을 얻진 못했다. 감수에 참여한 발달장애인들의 문해력이 상대적으로 좋아서 상당수 발달장애인들이 책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함 대표는 매주 한두 번 특수학교에서 발달장애인들과 함께 수업을 받으며 눈높이를 ‘느린 학습자’들에게 맞췄다.
쉬운 글 쓰기 위한 어려운 과정
피치마켓의 출판 과정은 일반적인 출판물에 비해 까다롭다. 느린 학습자가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작업이 필요하다. 기존의 작품을 다시 출판한다 하더라도 내용의 골격만 유지할 뿐 책을 새로 써야만 한다. 등장인물이 복잡하면 이를 정리해야 하고, 한 문장에 들어가는 어절 수를 간략하게 하고, 어휘는 쉽게 바꿔야 한다. 그리고 플롯이 복잡하면 느린 학습자들이 이해하기 어렵기에 시간순으로 이야기를 재배열한다. 발달장애인과 함께 감수를 진행하면서 퇴고는 최소 서른 번 이뤄진다. 비장애인들은 문장에 약간의 오류가 있더라도 글을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지만 느린 학습자들에겐 작은 오류가 큰 영향을 끼치기에 꼼꼼한 퇴고를 거쳐야 한다. 삽화 제작에도 느린 학습자가 직접 참여하며 책의 표지는 일부러 딱딱하게 만들어 느린 학습자들이 읽고서 자존감을 높이게 하고 있다.
함 대표의 피치마켓 사업을 두고 간혹 쓸데없는 일을 하는 것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그들은 쉬운 책으로 동화책이나 어린이용 도서가 있는데 왜 굳이 이런 책들을 별도로 제작하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함 대표의 생각은 다르다. 느린 학습자 중 상당수가 성인인데 이들이 필요로 하는 별도의 콘텐츠가 필요한 것이다. 근로기준법 서적과 선거공약집 출판은 이러한 생각의 연장선에 있다.
독서모임은 피치마켓이 직접 운영 중인 도서관을 비롯해 주로 수도권을 중심으로 복지관, 학교 등에서 진행한다. 피치마켓 도서관에는 작년에 2,000명 이상이 다녀갔다. 느린 학습자의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가 책을 읽고 고전과 시사에 대해 얘기하는 모습을 보고 벅찬 표정을 짓는다고 한다.
함의영 대표는 향후 피치마켓의 사업을 국내외로 확산시킬 계획을 세우고 조금씩 실행에 옮기고 있다. 그 일환으로 피치마켓의 책들을 이미 전국으로 배포 중이고 동남아와 영국에도 도서를 공급할 예정이다. 피치마켓은 출판 서적의 8할 가까이를 판매하지 않고 학교와 도서관에 기부하고 있다.
“책을 만들어서 판매하기만 한다면 그냥 출판사라고 해야겠지요. 피치마켓은 책이 널리 퍼져 정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가닿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함 대표는 유독 강원도에서 책을 신청하는 경우가 미미하다고 아쉬워한다. 이 사업의 보급을 위해 전국을 다니고 있지만 업무차 강원도로 오는 일 역시 거의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 그는 본인의 출신 지역인 설악권에서도 피치마켓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간곡히 당부했다.
이광호 객원기자 campin@hanmail.net
피치마켓 함의영 대표.
피치마켓이 출판한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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