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기다리는 봄의 마음이 느껴지는 훈훈한 저녁바람이, 아파트 1층 베란다 앞에 서있는, 작은 소나무 사이로 살랑거린다.
새로 오신 관리소장님의 부지런 덕에, 이쁜 나무벤치가 소나무를 바라보며 가지런히 놓여 겨울을 나더니, 새봄을 맞아 한층 앉아보라 눈짓한다. 오늘은 엄마와 꼭 저 벤치엔 앉아, 아버지를 기다려보리라 마음먹고 집안에만 계시는 친정엄마를 모시고, 앞마당으로 나들이 나왔다. 엄마걸음으로 치면 50걸음도 안 되는 곳인데, 정말이지 자식의 도리를 이렇게 못나게 하고 있었으니….
따뜻한 봄바람 속에, 엄마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자가용 타고 오시는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으니, 왈칵 눈물이 난다.
치매 탓에 시력도 떨어지고, 차디찬 손발 때문에 늘 추워하시니 나들이 나온 마당언저리의 바람도 스산하고 시리실텐데, 머리를 손으로 빗어 올리며, 새색시처럼 앉아계신다.
“에고 눈이 올려나 보다. 하늘에 눈이 담뿍 들었다.”
아~ 이 봄, 아름다운 이 저녁! 기우는 해는, 붉은 노을을 하늘 저편에 뿌리며 넘어가는데, 엄마가 바라보는 하늘엔, 회색구름이 잔잔히 박혀있으니 엄마의 세상에는 곧, 눈이 내릴 것이고 이제, 자가용 타고 오시는 아버지 걱정이 태산이시다.
“니 옷도 몇 가지 사가지고 오신다고 전화 왔었다.” “눈이 많이 내리면 길이 막혀서 오시기 힘들 텐데….”
적절한 타이밍에 내가 나선다. “엄마, 아버지 못 오신다고 전화 왔어.”
“아버지가 못 오신다냐?” 서운함이 잔득 베었다.
“엉….”
엄마야 늘상 하는 말이고, 나도 건성건성 하는 대답인데, 오늘은 왠지 아버지를 기다리는 엄마의 마음이 걱정된다. 집안에서만 아버지를 기다리시다, 이렇게 밖에 나와 기다리고 계시니 부푼 그 마음이 오죽하셨을까!
서운함을 한가득 안고 일어서는 엄마의 굽어진 허리와, 무겁게 걸어가는 작은 등을 바라보자니, 이 또한 마음이 아프다.
집으로 들어오니 거실 전기장판이 따뜻하다. 엄마는 차디찬 손을 넣으시며, “아이고 따스하다. 너도 어서 들어와 누워라” 하신다. “추운데 어서 와라”라는 말로 사계절을 다 표현하는 우리 엄마.
아버지를 기다리다 저녁준비가 늦었다. 식사준비를 하면서 달력을 쳐다보니 친정아버지의 5주기 기일이 이제, 한 달 정도 남았다.
엄마는 아버지 돌아가시고 일 년을 우시더니, 치매증세가 조금 진행되던 2017년 말부터 아버지의 죽음을 잊으셨다. 지우개가 현재를 지우면서 점점 과거의 기억들을 토해내는데, 그 많은 기억 중 아버지의 죽음을 잊는 건, 치매증세로만 보기에 자식들의 입장에선 너무도 슬프고 힘든 일이었다.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시더니 “셋째야~~ 경비실에 가봐라. 아버지 오신다고 전화 왔다.” “고구마를 가지고 오신다니 얼른 나가봐라” 하시며 성화셨다.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식구들 모두 당황했고, 나도 화가 나고 속상해서, 치매 걸린 엄마한테 정신 차리라고 얼마나 소리를 질렀던가.
시간은 쉬지 않고 바쁘게 흐른다. 엄마가 치매로 고생하신지 벌써 4년. 한 2년간은 엄마가 조금만 이상행동을 보이기라도 하면 그 상황을 수긍할 수 없어 울고불고 난리치기 일쑤였다.
그러다 주변에서 치매환자를 돌보려면, 첫째가 치매를 병이라고 인지하는 보호자의 자세가 제일 중요하다하여, 주간보호센터에도 다니시게 하면서 좌충우돌 뼈아픈 시간을 허비하다가, 3년차부터는 마음을 비우고 엄마의 세상에 스며들어 생활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한 겨울이 지나고, 꽃피는 새봄이 찾아왔다.
인생의 많은 것들이 학습으로 완성된다더니, 이제는 엄마와 함께 아버지를 기다리는 것이 일상이 되었고 아버지가 오시지 못하는 변명도 여러 가지로 늘어나게 되었다.
막내딸인 나는 늘 아버지가 그리웠다. 말 한마디 못하시고 황망히 떠나셔서 어쩌다 꿈에라도 나타나시면 그 모습 기억하고자 얼마나 두 눈을 껌벅이며 눈물을 참았는지….
지금도 아버지 생각만 하면 가슴이 시린데, 요즘은 그 위안을 엄마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시간여행 속에서 받고 있다.
“엄마. 아버지 못 오신다고 전화 왔어.”
서운함 가득히 되묻는데 어찌나 짠하던지…. “아버지 못 오신다냐?”
“엉….”
그날 새벽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깨어 거실에 나와 보니 엄마가 퀭한 눈을 바닥에 떨군 채 가방에 수건과 양말을 잔뜩 넣으시며 “내일 아버지가 엄마 데리러 온다고 전화 왔다.” “그동안 니가 고생 많았다.” “어여 들어가 자거라” 하신다.
엄마는 나를 낳아 입히고, 먹이고, 가르치고,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쏟아 키우셨는데 노년에 치매라는 병이 들어서도, 자식인 나에게 고마워하고 미안해하니 나는 세상의 이치를 엄마에게서 배우고 있는 아직도 철없는 엄마의 새끼인 것이다. 그러면서 어쩌면 아버지가 곧 엄마를 데리러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늘도 엄마의 시간여행에 탑승하여 다시는 할 수가 없는 추억을 만들고 있다.
어찌 보면 생각의 차이 아니겠는가! 여든여덟의 아내가 남편을 기다리며 현재를 지우고산들, 과거로 돌아가 추억을 먹고 산들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산다는 것 자체가 새벽을 기다리는 밤처럼 흥미진진하고 박진감 넘치는 진행형인 것을….
이명숙
속초여고총동창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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