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 잔인한 달,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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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 잔인한 달, 4월

등록날짜 [ 2019년04월29일 15시29분 ]

지난 4월 4일 발생한 고성, 속초 산불의 여파가 20여일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하다. 산불로 피해를 입은 이들의 망연자실이야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고 복구나 피해지원, 원인규명, 보상 등 갈 길은 멀다. 이번 산불로 우리 지역에 사는 이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 가슴을 쓸어내리는 큰 경험을 했다. 특히 아파트 밀집지역으로 산불이 번져 다들 피난대열에 나서야 했던 상황은 지금 생각해봐도 아찔한 순간들이었다.
필자의 경우에는 최초 발화지점이 새로 이전한 사무실이 위치한 곳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고, 도로 하나를 앞두고 건너편은 말 그대로 불바다였던 상황이어서 긴박함과 두려움이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도깨비불처럼 건너뛰며 옮겨 붙은 산불이 필자가 사는 아파트의 주차장 바로 앞까지 번진 상태여서 사무실을 지키면서 긴박하게 연락을 취하며 아파트에 있던 가족들을 대피시키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었다.
길었던 밤이 지나고 상황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뒤 맞이한 아침에는 이번 산불이 크게 부각되어 방송된 탓이었는지 휴대폰이 불이 나기 시작했다. 전국 각지에서 친인척들은 말할 것도 없고 평소에 연락이 뜸했던 친구들과 지인들까지 안위를 묻는 전화와 메시지들이 쇄도했었다. 필자와 같은 경험을 속초와 고성에 사는 거의 모든 이들이 했을 것이다.
순간 2002년 태풍 루사 때의 일들이 생각났었다. 이번 산불처럼 그 때도 예기치 못했던 사상 초유의 사태에 속초 일대가 쑥대밭이 되었고, 피해상황에 망연자실해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걸려오는 전화를 받느라고 정신이 없었던 기억이 난다.
이번 산불 이후 만나는 사람들마다 첫인사는 이번 산불로 피해는 없었는지 였다. 그리고 한참을 자신이 겪은 상황에 대해 마치 무용담처럼 서로 이야기 하곤 했다. 서로 이야기하다보면 필자처럼 아슬아슬하게 피해를 입지 않고 지나간 사람들이 있었던가 하면 온통 큰 피해를 당해 울음을 터트리던 사람, 너무나도 긴박한 상황에서 주변인들의 도움으로 피해를 최소화했던 사람, 여럿이 힘을 합쳐 급박한 상황에서도 피해를 막아냈던 사람 등 각양각색의 상황들이 펼쳐졌다.
태풍이든 산불이든 자연의 힘 앞에서 무기력하기만 한 인간의 모습을 보는 것은 새로울 것이 없다. 하지만 무소불위의 자연 앞에서도 힘을 모으고 지혜를 모아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인간의 모습들은 늘 새롭고 감동을 받게 한다.
이번 산불을 두고도 초동 대처와 이후 대처 방식에 대해 당리당략에 따라 접근하고 있는 정치권에 대한 불신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사업장이 전소되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상황에서도 “어쩌겠어, 다시 일어서야지!”라고 힘주어 말하던 한 친구의 굳은 입가의 희미한 미소가 인간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느끼게 한다.
이제는 우리가 그들에게 믿음과 희망을 느끼게 해주어야 할 것이다. 작은 정성이라도 모아서 그들에게 전하고 그들의 피해복구에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야 할 것이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로 봄비를 깨운다/ 차라리 겨울은 따뜻했다’로 시작되는 영국시인 T.S.엘리어트의 아주 유명한 시 ‘황무지’가 떠오른다. 매년 4월이면 늘 생각나기도 하고 여러 곳에서 자주 인용되기도 하는 그의 시가 올해는 더 절실히 가슴에 와 닿는다. 어서 빨리 피해 상황들이 복구되어서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전형배
데일리F&C 대표

설악신문 (soraknews@soraknews.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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