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영 회장은 서울에서 잘나가던 직장생활을 정리하면서 명태 관련 사업을 하리란 계획을 갖고 속초로 돌아왔다. 하지만 명태는 그해부터 출하량이 급격히 줄었고 이에 그는 일단 명태를 기다려 보기로 하고서 커피숍을 열었다.
김 회장이 속초 중앙로 현 KT플라자 옆에 연 ‘알프스’라는 커피숍은 당시로서는 이색 가게였다. 요즘은 원두커피를 판매하는 곳이 넘쳐나지만 당시에는 인스턴트커피를 파는 다방이 거의 전부였다. 김 회장이 1980년대 중반에 연 가게에서는 브라질 원두를 사용했고 주로 클래식 음악을 틀었다. 가게에서 직접 로스팅을 하지는 않았지만 원두 공급회사에 로스팅 방식을 따로 요청해 원두를 받아올 정도로 ‘알프스’만의 커피 맛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가 가게를 연 지 얼마 되지 않아 입소문이 났고 잡지와 방송에 소개되기도 했다. <레이디경향> 1987년 10월호 ‘속초의 카페’라는 기사에서는 그가 연 ‘알프스’에 대해 “고전음악이 흐르는 이색적인 카페로 알프스 산장이 연상되는 곳”이라고 소개하고 “꼭 한 번 들러볼 만”하다며 추천했다.
속초 시내에 연 커피숍 ‘알프스’
그의 가게에는 사진이나 연극을 하는 이들이 즐겨 찾았고 산악인들도 많이 왔었다. 그는 당시 낮에는 암벽을 타고 밤에는 가게 문을 여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게로 모여들었다. 그는 당시 오지 마을 진료에 헌신한 이기섭 박사에게 원두커피를 대접하며 친분을 쌓았고 이 박사를 통해 여러 유명인들을 만나 함께 산행을 했다.
김 회장이 원두커피를 처음 접한 것은 중학교 때의 일이다. 그때는 커피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마셨다. 그는 중학교 시절 고등학교 입시 공부에 매진하면서 커피를 접하게 됐다. 한번은 친구가 커피 원두를 가져온 적이 있는데 친구는 그걸 갈아 마시면 졸음을 쫓을 수 있다고 했고, 이후 그는 잠을 줄이기 위해 매일 커피를 한가득 들이키며 하루에 5시간 정도만 자고 공부에 열중했다.
그런데 어린 나이에 자신도 모르게 카페인을 과용한 때문인지,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저녁마다 불안감에 시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기숙사 다른 친구의 방에서 익숙하면서도 묘한 향이 흘러 나왔고 그는 그 향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노크도 없이 그 방의 문을 활짝 열었다. 방에서는 자식을 찾아온 학생의 부모님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 일을 통해 자신이 고등학교 입시 준비를 하면서 마시던 것이 커피임을 알게 됐고 이후 커피는 그의 삶에 있어 빠트릴 수 없는 한 요소가 됐다.
김 회장은 20대 후반에 속초로 돌아온 이후 권금성 산장지기였던 원로 산악인 유창서 씨로부터 커피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팔순을 넘긴 이 원로 산악인은 요즘도 하루가 멀다 하고 김 회장의 사무실을 찾아 이따금씩 직접 커피를 내리며 커피에 대한 얘기를 나누곤 한다.
“커피 맛과 향에 치중할 뿐”
김 회장이 운영 중인 ‘더 스쿠버 샵’에는 다이빙 장비 외에 등산 장비들도 보이고 커피머신과 몇 개의 오래된 커피 그라인더도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요즘은 김 회장이 커피를 주업으로 하고 있지 않지만, 그래도 김 회장의 커피는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어서 멀리 제주도에서도 찾는 이가 있다고 한다. 요즘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커피전문점들이 마케팅을 치열하게 하는데 김 회장 자신은 커피의 맛과 향에 치중할 뿐이라고 얘기하며 이를 다음과 같은 말로 한 번 더 강조한다.
“저는 마케팅이 아니라 ‘맛케팅’이에요.”
2012년 <스포츠동아>에 연재된 허영만의 ‘자전거 식객’ 20회 기사에는 김규영 회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콜롬비아 수프리모 원두를 골동품에 가까운 분쇄기로 사각사각 갈고 종이 필터에 거르는 동안 은은하게 퍼지는 커피향이 우중충해진 마음을 부드럽게 다독여준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김 씨는 우리나라 원두커피 핸드 드리핑계에서 손꼽히는 전문가다.”
몇 해 전부터 강릉이 커피로 유명한데 김 회장의 기억에 따르면 그가 속초에 커피숍을 연 때인 1986년에는 강릉에 원두커피 전문점이 없었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강릉의 커피 명인이 강릉에 정착한 것이 2000년이다. 원두커피 전문점이 강릉보다 먼저 생겼고 커피를 자주 즐기는 산악인들이 많은 속초가 어쩌면 강릉보다 이른 시기에 커피로 유명해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음에 계속>
구술 김규영 속초시요트협회 회장
정리 이광호 객원기자 campin@hanmail.net
김규영 회장의 ‘더 스쿠버 샵’에는 커피·등산·스키·낚시 관련 물품들이 여기저기 배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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