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옹은 팔순이 가까운 나이이지만 나이에 비해 상당히 건강해 보이며 지금도 여전히 일을 하고 있다. 관광객이 많이 오는 날이면 가끔씩 아바이마을 갯배 탑승장에서 호출이 와서 일을 하러 나가며 또한 공공근로에 꾸준히 참여한다.
그리고 이따금씩 그에게는 방송 관계자나 교수, 학생들이 찾아오곤 해서 그들을 도와 줄 때가 있다. 몇 해 전 서울대 인류학과 박사과정 학생의 청호동 연구를 도와 준 바 있고 작년엔 서울대생의 함경도 무속 연구에 도움을 줬다.
갯배의 추억
김 옹이 갯배 탑승장에서 일하는 모습은 남달라 보인다. 그곳에서 그에게 주어진 일은 탑승료를 받는 것인데 그는 매우 적극적인 자세로 일한다.
탑승장 앞에 사람들이 많이 몰릴 때면 일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배 두 대가 양쪽에서 오고가는 시간이 짧고 두 대의 출발 시간이 달라 배가 연이어 도착하면 돈을 받는 일만 해도 한참 이어진다. 그리고 탑승장 앞이 금세 어수선해지기에 그는 사람들이 줄을 잘 설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잔돈을 미리 준비하도록 알려준다. 갯배를 어떻게 이용하는지 묻는 사람도 적지 않아 이런 사람들에겐 따로 안내를 해야만 한다. 또한 줄을 서지 않고 막무가내로 타려는 사람들에게도 차분한 설명이 요구된다. 단순한 일을 하는 것 같지만 김 옹은 갯배 앞에서 계속 바쁘다.
잠깐 여유가 있을 때에는 줄은 선 관광객들에게 갯배와 아바이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짧지만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설명이기에 관광객들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알게 된 것에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김 옹은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도 먼저 말을 붙이는데 간단한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김 옹은 아바이마을을 더 잘 알리기 위해 사위에게서 영어를 배웠다고 한다.
그리고 더 한가해지면 잠시 숨을 돌릴 법도 하지만, 김 옹은 일을 멈추지 않는다. 이번에는 관광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를 줍는다.
“예전에는 학생들이 참 많았어요.”
김 옹은 갯배를 타고 등교하던 중학교 시절을 떠올렸다. 1950년대에는 아바이마을에 어린 학생들이 많았다. 그 많은 학생들이 학교에 가기 위해 갯배를 이용했다. 등하교 시간에는 학생들이 가득했고 중학교 3학년쯤 되면 후배들에게 눈치를 줘서 갯배의 줄을 당길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젠 다 옛일이다. 학생은커녕 하루 종일 있어 봐도 갯배를 이용하는 청호동 주민은 몇 되지 않는다. 지금은 갯배가 주민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관광객들에게 추억을 선물하는 명물로 바뀌었다.
“그때는 갯배가 이웃 간에 대화를 나누는 운치 있는 장이었지요.”
과거에는 지금과는 달리 갯배의 운행 거리가 더 길었고 시간도 더 걸렸다. 그래서 갯배를 타고 오가며 마을 주민 간에 이야기꽃이 피어났다. 시장에 가서 무엇을 샀는지, 집안에 걱정거리가 뭔지 얘기하며 이웃 간의 정이 더 돈독해질 수 있었다.
‘기 - 승 - 전 - 아내’
김 옹은 1주일에 3일은 공공근로를 위해 청호초등학교에 나간다. 청호초교는 바다 옆에 있어서 담벼락 쪽에 서면 바다가 아주 잘 보이지만 김 옹은 애써 바다를 쳐다보지 않는다고 한다. 그 까닭을 묻자 김 옹은 정확하게 이유를 얘기하지 않는다. 김 옹의 집은 바다에서 걸어서 5분이지만 평소에도 바닷가로 나가보지 않는다고 한다.
김 옹은 젊은 시절부터 뱃일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어쩔 수 없이 바다로 돌아오곤 했다. 김 옹의 아내는 그런 그가 바다에서 일할 수 있도록 힘을 주는 존재였다. 그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비로소 뱃일을 하지 않게 됐다.
김 옹이 바다를 쳐다보지 않으려 함은 그가 그토록 뱃일에서 벗어나려 한 것의 연장선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 이유를 더 추가할 수 있다. 그가 애써 바다를 보지 않는 것은 그의 아내가 세상을 떠날 때 김 옹 자신이 바다에 있었던 상황을 원망하는 행위로 보인다. 그는 바다를 쳐다 볼 때마다 30여 년 전 먼저 떠난 아내를 떠올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김 옹의 청호동 자택 거실 벽에는 자식들의 표창장이 즐비하다. 김 옹은 심각한 얘기를 하다가도 자식들의 이름이 적힌 상장들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김 옹은 그의 자식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공무원 등으로 성실하게 재직하는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한다. 김 옹이 자식들과 전화 통화를 하는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자식들의 효성도 남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김 옹은 자식들에게 효도를 받다 보면 먼저 떠나간 아내 생각에 마음이 아프다고 한다.
김 옹은 구술을 하면서 상당한 시간을 아내에 대해 말하려고 했다. 피난살이를 떠올리다가도, 학창시절 얘기를 하다가도, 어부 생활을 기억하다가도, 얘기는 어느 순간 무슨 도돌이표를 만난 듯 아내 얘기로 이어졌다. 아홉 차례에 걸친 김 옹의 구술은 요즘 하는 얘기로 ‘기-승-전-아내’였다.
청호동 아바이 김상호 옹
한 인간의 삶은 역사에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분단이 되지 않았다면, 전쟁이 없었다면 김상호 옹의 삶은 어땠을까? 전쟁이 없었다면 그는 경제적으로 윤택했던 북청 친가나 외가의 도움으로 공부를 계속 이어가서 그가 좋아하던 수학에 재능을 보이며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지 모른다. 그의 가족, 그리고 그의 외숙부가 월남하지 않았다면 그는 부산 외숙부의 공장에서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렇다면 그는 그의 아내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김 옹은 앞으로 그의 고향 마을에 다시 가볼 수 있을까? 이 또한 역사의 흐름에 달려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가 고향에 다시 갈 수 있든 없든 그가 ‘청호동 아바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는 앞으로도 속초를 찾는 이들에게 청호동을 알리는 일을 충실히 해나갈 것이다.
<끝>
구술 김상호 · 정리 이광호 객원기자
갯배 탑승장에서 일하며 관광객들에게 아바이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김상호 옹.
청호동 아바이 김상호 옹.
김상호 옹의 청호동 자택 거실 벽에는 자식들이 공무원 등으로 재직하며 받은 표창장과 상장들이 즐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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