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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리 성지(束草里 城址)<3>
석성산성은 신라통일기 후기에, 양양읍성은 고려 중~후기에 축성
등록날짜 [ 2019년01월07일 09시55분 ]

속초성의 축성 또는 중수연대로 추정되는 ‘천경3년’(天慶三年, 고려 예종 8년으로 1113년에 해당)이 적힌 기와와 ‘관(官)’자 등의 명문기와 등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국가정책으로 만들어진 성(城)임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 익령(翼寧)에 별장을 3인 배치했다는 것은 별장이 지휘할 성이 3개 이상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는데, 익령 내의 3개의 성은 양양군 경내(境內)의 축성시기를 볼 때, 나말여초의 양양 임천리의 석성산성(石城山城), 신라시대부터 사용되어 온 현남면 후포매리 산성(後浦梅里 山城)과 지금 논하고자 하는 1113년에 축조 또는 중수된 속초성(束草城)으로 보여진다.<연재를 이어가며>

■영동지역의 성곽(城郭)의 특성
『한국의 읍성』에서는 “성(城)은 쌓는 위치에 따라 도성(都城), 산성(山城), 읍성(邑城), 진보(鎭堡)로 나눈다. 이 가운데 산성과 진보는 전투(戰鬪)를 목적으로 쌓은 성(城)이고, 도성과 읍성은 행정(行政)과 생활(生活)을 위해 쌓은 성(城)이며, 이외에 창성(創成), 역성(驛城), 행성(行城), 차단성(遮斷城) 등이 있다(「조선시대 강원지역의 축성연구」, 유재춘)”고 한다.
영동지방에 분포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성곽은 영동지방에 분포하고 있는 성곽의 특징과 관방체계, 교통로 등을 검토해 볼 때 크게 해안성(海岸城), 거점성(據點城), 입보용산성(立保用山城)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해안성-거점성-입보용산성의 분포양상은 3~4단계의 관방체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 관방체계는 성곽에서 확인되는 고려시대 유물들로 보아 고려시대에 완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관방체계는 11세기 북동쪽 동여진부터 14세기 남동쪽 왜구의 동해안 침입에 대한 방어체계로 생각되며, 또한 몽고병란기에도 입보용산성이 거점으로 관방체계를 유지하게 된다.
또한, 해안성-거점성-입보용산성의 분포양상은 입지에 따라 산성-평지성-평산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평산성(平山城)은 동여진·왜구의 동해안으로의 약탈·침입이 계속되어 협소한 영동지방의 평지와 해안으로부터 침입하는 적들로부터 방어기능을 높일 뿐만 아니라, 군대를 주둔시키고 훈련하는 진(鎭)이 필요함에 따라 현재 해안성들이 위치한 곳과 읍성들 사이 평지 곳곳에 진성(鎭城)을 축조하였고, 평지성(平地城)은 주요 지방도시에 축조된 읍성으로 농지관리 등 지방업무를 지원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김진형은 「영동지방 고려 성곽 연구」에서 ‘해안성은 성광의 둘레가 600m미만인 소규모의 퇴뫼식 석성이 대부분이며, 이 성곽들은 동해안에 인접하고 사방관측에 유리한 타원형으로 축조되었으며, 거점성은 평지성, 평산성으로 고려사회가 안정되면서 행정적 기능을 추가시킨 성곽이다. 거점성은 처음에 토성으로 축조되었으나, 점차 외부세력의 침입으로 행정기능뿐만 아니라 군사적 기능도 수행하게 되어 석성으로 변모한다.’
한편, 동해안지역의 방어를 위해 병선(兵船)을 배치하거나 해안지역에 축성을 배치하면서 여진과 왜구의 침입을 대비하였는데, 최근 조사된 바에 의하면 강원도에 존재하는 89개의 성터중 동해안지역에는 총 45개의 성곽이 존재하는데, 이 중 고려시대 여진과 왜구의 대비를 위해 산성을 새로 쌓거나 보수한 것으로 파악된 성은 19개로 나타났다.(『강원도사 4』)

■고려 목종 10년. 익령에 쌓은 성은
≪고려사절요≫ 목종 10년(1007년) 10월에 흥화진(興化鎭; 평북 의주군)ㆍ익령(翼嶺; 강원 양양군)ㆍ울진현(蔚珍縣; 경북 울진군)에 성을 쌓았다(‘城興化鎭翼嶺蔚珍縣’)라는 기록이 있는데, 익령에 쌓은 성이 현재의 양양읍성을 지칭하는지 아니면 익령관할 지역 내에 성을 쌓았다고 하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후, 고려말 1385년(우왕 11), 허주(許周)가 지양주사(知襄州事)로 있으면서 읍성을 다시 축조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고려사 병지(兵志)에는 ‘익령현에 성을 쌓았는데 348간(間)이고, 문이 넷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조사자료』에는 ‘속초성이 주위 약 300간(間, 1간=약1.8m, 300간=약540m)’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거의 비슷한 규모임을 예상할 수 있다.
지난 2008년 양양읍 임천리의 석성산성(石城山城)이 발굴되기 전까지만 해도, 목종 10년(1007년)에 익령현에 축성된 성은 지금의 양주성(襄州城)으로 간주되어 왔다.『양양군지』에서는 이 성을 양양읍성(襄陽邑城)으로 보고 있다.
양주성(襄州城)이라는 명칭이 일반명사인지, 고유명사인지, 치소성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익령현이 양주가 된 기록은 고려사에 1221년 거란병의 침공을 물리친 공으로 양주방어사(襄州防御使)로 승격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1221년 이후에나 양주(襄州)로 불리었을 것이다.
그러나 석성산성에 대한 발굴 후, 통일신라기 익령현의 치소성이 석성산성으로 비정되었으며, 지금의 양양읍성에 대해서는 조선시대에 운영된 양양읍성의 성벽구간에 대한 최근의 발굴조사결과, 양양읍성은 고려시대 중기~후기에 토성으로 먼저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고려 우왕 11년(1385년) 허주(許周)가 지양주사(知襄州事)로 있으면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새로이 읍성을 다시 축조하였다는 기록을 통해, 현재의 양양읍성이 고려시대 후기에 새롭게 축성된 것임을 입증해 주는 사례가 된다고 생각된다.
즉 익령현의 이전 치소성인 석성산성은 이미 신라통일기(남북국시대) 후기에 축성·운영되었고, 양양읍성은 고려 중~후기에 축성된 성으로 목종10년(1007년)에 축성된 익령현의 한 성과는 시기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시기적으로 정리해 볼 때 전국에 4도호(都護)ㆍ8목(牧)ㆍ56지주군사(知州郡事)와 28진장(鎭將)ㆍ20현령(縣令)을 두었던 현종 9년(1018년) 2월에 익령현에도 현령을 두고 동산현(洞山縣)을 속현(屬縣)으로 하였으며, 기존의 양주성(석성산성)을 치소로 두었고, 우왕때 허주(許周)가 지양주사(知襄州事)로 재임하면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주민들을 보호하기 쉬운 거주지역 인근에 읍성(지금의 양양읍성)을 새로 축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고려 우왕(1375~1388)시기는 왜구가 침입이 극성을 부리던 시기였으며, 이후 조선시대로 들어와 세종 11년에 연해지역을 읍성위주로 운영하고 산성을 폐지하도록 명하던 시기에 ‘석성산성’이 완전히 폐하였다고 볼 수 있다.
본 단원에서 속초성의 축성 성격분석을 하기 전에 목종10년(1007년)에 익령현에 축성된 성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다음에서 논할 속초성의 축성시기와 축성목적과도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계속>
정상철
속초문화원 부설
속초시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

영동지방의 관방체계
폴 팬쳐(Paul Buford Fancher)가 기증한 속초항공사진(원안이 속초리성지) 지금은 각종 개발 및 주택건축으로 원형이 훼손되었지만, 지난 1963년경 속초에 주둔해 있던 미군 통신부대 근무하던 폴 팬쳐(Paul Buford Fancher) 중위가 기증한 속초리 항공 사진에는 속초리성지의 원형이 잘 나타나 있다.
 

설악신문 (soraknews@soraknews.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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