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황유미를 죽였나요.”
애잔한 음악을 타고 송경동 시인의 시가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든다. ‘그리운 보리밥’ 이진여 대표는 그 긴 시를 한 번도 틀리지 않고 마치 연극을 하듯 비장하게 낭송한다. 보광병원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최정화 씨의 클라리넷 연주 후,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비가처럼 울려 퍼지는 시 한 편에 관객의 표정도 무겁다.
5일 속초 교동 공간 소극장에서 열린 ‘삼성 반도체 직업병 문제 해결 기념 문화제’는 지역의 평범한 시민들의 연주와 낭송으로 시작됐다. 이 자리에는 그간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한 지역 모임인 ‘황상기 님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비롯해 이 문제의 중심에 있었던 시민단체 ‘반올림’ 관계자들, 속초고성양양환경운동연합, 속초경실련 등 지역 시민사회 관계자들이 함께했다. 속초, 고성, 양양뿐만 아니라 강릉, 춘천, 화천, 그리고 멀리 서울에서도 문화제에 참여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 있었다.
“유미야, 미안해”
시낭송 후 이어진 대화의 시간에서는 문제 해결에 앞장선 이들이 관객들에게 소감을 들려줬다. ‘반올림’과 삼성전자는 최근 조정위원회의 중재안을 수용했고, 삼성전자 김기남 대표이사는 지난달 23일 있었던 중재판정 이행합의 협약식에서 반도체 직업병 사태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삼성전자 기흥공장에서 일하던 속초상고 출신 황유미 씨가 백혈병으로 숨진 지 11년 만의 일이다.
반올림의 이종란 노무사는 “황상기 아버님을 처음 봤을 때 슬픔과 분노에 찬 말들을 쏟아내던 모습이 선명하다”면서 “말로는 10년이 걸릴 수 있는 싸움이라고 했지만 정말 10년이 넘을 줄 몰랐다”고 말하며 해결까지 그토록 길었던 시간에 스스로도 놀란 모습을 보였다.
“저는 당시 수원에서 주로 중소기업 노동자들을 상담했습니다. 그랬던 제가 대기업인 삼성과 관련한 문제를 맡게 된 것입니다. 결과를 장담할 수 없었지만 이 싸움을 통해 노동자의 인권을 조금이라도 개선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서 시작했습니다.”
대담 사회를 맡은 김세형씨가 “이제 반올림을 그만할 때가 됐을까요?”라고 질문하자 반올림의 이상수 활동가는 반올림이 해야만 하는 일들이 더 많이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반도체 직업병 문제는 어찌 보면 시작입니다. 삼성은 수많은 계열사와 해외 지사를 거느리고 있고 여러 하청업체들과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와 연관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생각입니다.”
이종란 노무사는 여기에 말을 보탰다.
“현재 제도상으로 산업재해는 노동자들이 증명하게 돼 있습니다. 반올림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그다음 차례인 한혜경 씨의 목소리는 너무도 떨렸다. 한 씨는 삼성전자 기흥공장에서 일하다 ‘소뇌부 뇌종양’에 걸렸고 장애 1급 판정을 받았다.
“제가 삼성에서 일하다 몸도 아프고……, 그런 나쁜, 내 몸이 안 좋아진 거잖아요. 왜 화학약품 쓴 거를 삼성이 안 말해줘요. 왜 그러냐고요.”
천천히, 한 마디, 한 마디, 한 씨의 목소리는 말하는 동안 계속 떨렸지만 삼성전자를 향한 분노와 원망의 감정은 더욱 크게 전달됐다. 발언을 마친 후 앉은 채로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려던 한 씨는 비틀거리며 중심을 못 잡고 쓰러질 뻔했다.
황유미 씨의 아버지이자 반올림의 대표인 황상기 씨에게 사회자가 “딸에게 하고 싶은 말을 들려 달라”고 하자 황 씨는 “유미가 심하게 앓을 때 억울함을 밝히겠다고 약속한 건 지켰는데 가장 소중한 건 못 지켰다”고 얘기한 후 짧은 말을 더했다.
“유미는 희생정신이 강했습니다. 유미야, 미안해.”
기념 공연으로 분위기 고조
피해자와 가족들, 그리고 반올림 활동가들과의 대담이 끝난 후부터는 마치 동네잔치처럼 점차 분위기가 밝아졌다. 즉석에서 벌어진 3행시 짓기 대회에서는 황상기 씨의 성명에 맞춰 참신한 이야기들이 나왔다.
“황. 황제를. 상. 상대한. 기. 기사들, 반올림”
“황. 황상기 님의 오랜 투쟁을. 상. 상기하여. 기. 기업윤리 바로잡자.”
여기에는 교동초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도 참여했다.
“황. 황상기 님. 상. 상상 속에서, 꿈속에서. 기. 기억할 거예요.”
3행시에 참여한 이들에게는 그리운 보리밥 이진여 대표와 최근 고성 봉포 해안에서 커피숍을 개점한 토성면 주민 신종출 씨가 각각 양말과 커피쿠폰을 상품으로 제공했다.
이후 반도체 직업병 문제 해결을 기념하는 공연들이 이어졌다. 먼저, 양양군민 노미화 씨는 남편이 만든 노래를 관객들에게 들려줬다. 그리고 화천에 살며 ‘별음자리표’라는 별칭으로 활동하는 가수 홍성배 씨도 공연자로 나섰다. 홍 씨는 공연 전 ‘유미’, ‘더께’라고 직접 쓴 서예 작품을 가져와 각각 황상기 씨와 한혜경 씨에게 선물했다. 그리고 실내의 불을 거의 다 끄고 아름다운 기타 선율로 노래를 들려주며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 외에 속초고등학교 학생들이 만든 동영상이 상영됐고 고성에 거주하며 음악 작업을 하는 ‘노마’가 ‘좋은 나라’라는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이주연 씨 등 지역 주민들이 직접 드럼을 연주하며 분위기를 한껏 북돋웠고 마지막 곡으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가 울려 퍼질 때에는 모두가 일어나 축제의 분위기를 즐겼다.
이날 문화제는 시작부터 끝까지 시민들이 직접 만들었다. 스텝으로도 시민들이 자원하여 나섰다. 문화제가 끝난 후에는 음식을 나누며 그동안 애쓴 이들의 노고에 감사를 표했고 앞으로의 남은 과제를 얘기하는 등 밤늦게까지 자리가 이어졌다. 이광호 객원기자
‘삼성 반도체 직업병 문제 해결 기념 문화제’가 지난 5일 속초 교동 공간 소극장에서 열렸다.
공연 마지막에는 관객들이 모두 일어나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삼성전자 기흥공장에서 일하다 장애 1급 판정을 받은 한혜경 씨(오른쪽)가 인사를 하려다 비틀거렸다.
화천에 거주하는 가수 ‘별음자리표’(오른쪽)가 직접 쓴 서예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
속초시민 이주연 씨의 드럼 연주로 문화제의 분위기가 일시에 크게 고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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