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탄주(Bomb shot)는 제정 러시아시대에 시베리아 벌목노동자들이 추위를 이기기 위해 보드카를 맥주와 함께 섞어 마신 것이 기원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폭탄주는 1970년대에 미군들이 들여와 확산되었으며 1980년대에 쿠데타로 집권하고 정치에 나선 신군부 군인들이 정치계와 법조계, 언론계 인사들과의 술자리에서 만들어 마시면서 음주문화의 한 형태로 자리 잡았으며, 이후 접대문화가 활성화 되면서 폭탄주 종류도 다양해졌는데 50여 가지 제조법이 있다고 한다. 두 가지 술이 섞이며 오르는 거품이 원자폭탄의 버섯구름 같아서 지어진 이름만큼이나 거친 술로써 패가망신은 물론 과음으로 인해 종종 목숨까지 앗아가기도 하지만 뿌리치기 힘든 마력을 지닌 치명적인 유혹의 술이 폭탄주이다.
인위적으로 만난 서먹서먹한 분위기의 회식자리에서 누군가 “한잔 말아야죠?”하며 소주에 맥주를 섞은 ‘쏘맥’ 폭탄주가 돌아간다. 묘하게도 짧은 시간에 좌중의 어색함이 눈 녹듯 사라지는 마법이 일어난다. 폭탄주가 좋은 점은 빠르게 취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관계 맺기의 약점을 보완해 주는 단면이 있기 때문이다. 폭탄주는 대개 한사람이 조제를 하는데 일정한 양을 참석자 모두에게 평등하게 분배한다. 다 같이 한잔씩 하거나 순서대로 예외 없이 잔이 돌아간다. 한 번에 쭉 들이켜고 다 마셨다는 소리를 내거나 빈 잔을 머리 위에 털기도 한다. 투명한 평등주의적 자세를 집단의 힘으로 강제하는 것이 폭탄주 문화의 핵심 중 하나다.
폭탄주로 평등주의를 실현한 다음으로는 술자리에 함께한 사람들과의 결속을 강화하면서 개인적 취향이나 차이를 일시적으로 정지시키는 ‘우리는 하나’라는 동질성의 단계로 진행하게 된다. 흡수력이 빠른 평등한 폭탄주를 순서대로 마시면 대뇌의 중추신경은 쉽게 무장해제가 되어 어색함, 도덕심, 눈치보기 등이 사라지고 충동적이며 공격적인 원초적 본능에 충실해져서 집단퇴행상태에 빠져 ‘우리는 하나’라는 동질성을 쉽게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친밀하고 애틋한 사이의 사람들은 폭탄주를 거의 마시지 않는다. 폭탄주를 마시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들은 그다지 친하지 않고 별로 친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 관계일 경우가 많다. 이들은 여러 이유로 서로 간에 ‘우리는 친하다’는 최면을 걸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 있는 경우이거나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서 급하게 친해질 필요성이 있을 때 폭탄주를 마신다. 폭탄주는 친해야 하는 사명감과 친해지고 싶지 않은 개인적 욕구 사이의 딜레마를 저비용으로 해소해 주는 솔로몬의 지혜이다.
다양한 사람이 만나는 낯선 술자리에서 어색함을 녹이려고 폭탄주가 등장하는데 평소에 잘 모르던 사람과 친해지려면 대화를 많이 나누고 취향을 살피며 성격까지 맞춰야 하지만 이런 정공법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 자칫하면 함께 할 사람이 못 된다는 결론에 도달할 가능성도 있다. ‘우리는 친하다’는 최면을 빨리 걸어야 하는 특별한 상황에선 이런 정공법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폭탄주가 필요하고 가까워졌다는 느낌과 개인의 정체성 유지라는 딜레마에 놓일 때 폭탄주는 쉽고 편리하게 가성친밀감(pseudo intimacy)을 만들어 준다.
필자도 젊은 시절에 대인관계를 원만히 하기 위한 사람들과의 술자리에서 폭탄주와 함께 몇번 대취했던 경험이 있지만 따지고 보면 모임에 함께 했던 그들과의 만남이 어느 정도 형식적, 가식적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는 나이 들었음인지 ‘섞어라, 마셔라, 뭉쳐라’를 넘어 절친한 사람들과 조용한 찻집에서 한적한 주점에서 우아한 와인 바에서 그윽한 눈빛으로 열린 마음으로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뜻있는 시간을 가지고 싶다.
최영걸
속초시사회복지협의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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