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대학은 보강주간이다. 이제 12월 둘째 주부터 기말고사를 치르면 사실상 겨울방학이 시작된다. 캠퍼스 가로수의 ‘마지막 잎새가 방학의 시작’이라는 원로교수의 유머가 생각난다. 학기 마무리 시점에는 모두가 바쁘다. 여러 가지 학사 일정이 바쁘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세상사 무슨 일이든지 갈무리 때가 가장 바쁜 것은 예외가 없나보다.
농부는 가을걷이 추수 때에 가장 바쁘다. 그래서 “부뚜막에 졸던 부지깽이도 뛴다”는 속담도 있다. 학교에서 추수는 학기말이다. 그런데 이때쯤이면 갑자기 나타나는 학생들이 더러 있다. 평소에 학교생활 제대로 하지 않던 학생들이다. 미적거리다 과제물제출 시한을 놓치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낭패다. 어쩌면 남들은 즐거운 방학을 맞이할 때 추위에 떨며 계절학기로 학점을 채워야한다. 그도 아니면 필시 내년 여름학기에 코스모스 졸업을 해야 한다.
필자와 같은 층에 미국인 교수연구실이 있다. 그 이름도 특이하게 잉글리시이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연구실 문 앞에 붙여놓은 쪽지를 발견했다. “Please Note : Any late papers, put under my door get an automatic zero!”. 직역하면 “참고 사항 : 연구실 문 밑에 늦게 제출한 과제는 자동 빵점!”라는 내용이다.
게으름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늦기 전에 제시간에 제출해야 한다. 초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학생이 입학식 날 처음 대학 등굣길을 올라오면서 마음속으로 했던 다짐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 때 그 마음이 변치 않고 지속되었더라면 이런 낭패는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성인동화의 장르를 개척한 정채봉 아동문학가의 ‘첫 마음’이라는 시가 있다.
1월 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 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 학교에 입학하여 새 책을 앞에 놓고, 하루 일과표를 짜던 영롱한 첫 마음으로 공부를 한다면 / 사랑하는 사이가, 처음 눈이 맞던 날의 떨림으로 내내 계속 된다면 / 아팠다가 병이 나은 날의 상쾌한 공기 속의 감사한 마음으로 몸을 돌본다면 / 개업 날의 첫 마음으로 손님을 언제고 돈이 적으나, 밤이 늦으나 기쁨으로 맞는다면 / 세례 성사를 받던 날의 빈 마음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교회에 다닌다면 / 나는 너, 너는 나라며 화해하던 그날의 일치가 가시지 않는다면 / 여행을 떠나던 날 차표를 끊던 가슴 뜀이 식지 않는다면 / 이 사람은 그때가 언제이든지 늘 새 마음이기 때문에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날마다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
첫 마음으로 평생을 산다면 인생 가을걷이에 허망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인생은 벡터’라고 정의한다. 벡터는 방향과 크기로 결정되는 물리량이다. 변위가 벡터이기 때문에 속도 역시 벡터이다. 그러나 방향이 먼저다. 목적지가 분명해야 한다. 방향이 잘못되면 허사다. 멀리 갈수록 돌아오는데 왕복 시간이 걸린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향만 제대로 맞으면 속도가 늦더라도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착한다. 단지 조금 늦을 뿐이다. 만일, 자동차가 이정표를 무시하고 향방 없이 질주한다면 비극이다. 지금 바로 멈춰야 한다. 세상에는 세 개의 금이 있다. 황금과 소금 그리고 지금이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이다. 왜냐하면 지금이 없으면 황금도 소금도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국가지도자나 기초 단체장이 취임식 때 첫 마음 그대로여야지, 아니라면 비극이다. 국가와 국민의 안위가 달려있고, 지역과 지역민의 미래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대북, 소득, 복지, 에너지 정책의 방향이 옳은가? 속도가 아닌 방향이다. 옳고 그름은 민심이 말해준다. 정도를 가고 있는지 아니면 그릇 행하는지 점검해야 한다. 지금 바로, 늦기 전에, 너무 늦기 전에.
최철재
경동대 교수․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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