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다섯 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각. 전태극 작가가 집을 나선다. 작가는 커다란 가방을 메고 사진기를 들고서 차를 몰지 않고 어두운 공간을 걸어서 헤쳐 나간다.
그의 발길이 처음 멈춘 곳은 속초해수욕장. 낮 시간 동안 사람들이 어수선하게 북적였을 8월의 그 공간에는 그날따라 몹시 거친 파도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해변을 따라 걸을 때 저 멀리 바다 너머 밝아 오는 여명은 너무도 아름답다. 작가가 왜 그 시간에 속초 해안을 찾는지 확실히 느끼게 해준다. 사진이나 영화를 하는 사람들이 자주 얘기하는 ‘매직 아워(magic hour)’의 시작이다. 많은 사람들이 꿈속에 있을 시간이지만 하늘에는 마법이 펼쳐지는 순간이다.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곳은 한층 더 강렬하다. 작가는 걷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며 셔터스위치를 누른다.
매일 보고 또 보는 광경이지만 작가는 걸으면서 관찰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비슷한 장면을 어제도 찍었겠지만 오늘도 다시 사진으로 담는다. 아마 그 다음 날도 작가는 같은 장소에서 전날과 별 차이 없어 보이는 모습들을 촬영할 것이다.
외옹치의 언덕에 올랐다가 해안으로 내려올 때쯤이면 태양이 떠오를 준비를 한다. 그리고 어느 틈에 해변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보인다. 사람들의 눈은 떠오르는 해를 향해 있다. 작가의 사진기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 있다.
속초해수욕장을 지난 작가의 발걸음은 계속 이어진다. 해안을 따라 유정충 선장 동상에 다다르면 작가의 카메라는 다시 바빠지고 설악대교에 올라서면 작가의 렌즈는 바다를 향한다. 아바이마을에서는 아바이 동상을 빠트리지 않고 매일 촬영한다.
그리고 다시 작가의 발길은 해안을 따라 속초해수욕장으로 내려온다. 그때가 오전 일곱 시쯤이다. 갔던 길을 되돌아오는 도중에 한 환경미화원이 인사를 건넨다. 작가의 사진 수업을 들었던 사람이다. 열심히 강의를 듣다가 바쁜 삶에 쫓겨 요즘은 수업을 듣지 못하는 미화원의 표정에는 아쉬운 눈빛이 어려 있다.
작가가 해송 숲을 지날 때에는 나무 사이로 갈라져 들어오는 햇빛들이 근사하다. 숲으로 들어오는 맑은 빛들은 이른 아침 길게 늘어진 나무의 그림자들과 어우러지며 패턴을 만들어낸다.
무거운 가방이 심장박동기를 눌러도…
작가의 아침 출사는 해송 숲을 지나 마무리된다. 그런데 어떤 날은 북쪽으로 동명항까지 가기도 하고 남으로는 대포항까지 내려갈 때도 있다. 그런데 하루 출사가 이걸로 끝이 아니다. 작가는 집으로 가서 아침 식사를 하고 10시 반에 다시 나온다. 그리고 4시까지 속초 시내를 돌며 사진을 찍는다. 강의나 별 다른 일정이 없는 한 작가는 휴일도 없이 매일 일곱 시간 이상은 거리에서 사진을 찍는다. 이런 까닭에 작가가 새 신을 사도 금세 많이 닳는다. 신발 구입 후 한 달만 지나면 뒷굽이 닳아서 버릴 지경이 되기에 뒷굽만 다시 붙이고는 한다.
하루에 오래도록 걷는 것은 체력적으로 만만하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작가의 몸에는 심장의 기능을 보조하는 심장박동기가 부착돼 있다. 작가의 심장이 좋지 못해 왼쪽 어깨 앞쪽 피부 아래에 이 장치를 심었다. 작가가 짊어진 가방의 끈이 이 심장박동기를 누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이에 아랑곳없이 무겁고 큰 배낭을 메고 출사를 나간다. 가방의 끈이 박동기를 압박해 오작동을 일으킬 수도 있어 보이는데 작가는 그저 담담한 자세로 자신의 건강 상태에 대해 말할 뿐이다.
작가는 살면서 뇌출혈을 두 번이나 겪었다. 뇌출혈은 언어·보행 장애, 사지 마비 등의 후유증을 불러 올 수 있는 무서운 병이다. 왼쪽 어깨의 심장박동기, 두 번의 뇌출혈, 그리고 60대 중반의 나이, 이것만 고려하면 작가가 매일 무거운 가방을 메고 손에는 카메라를 들고 오래도록 걸으며 사진을 찍는 것이 외줄타기처럼 매우 아슬아슬한 행동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가 짐을 휴대하고 장시간 걷는 것은 건강에 유익한 운동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작가가 장시간 출사를 나가는 것은 그를 건강하게 만드는 좋은 습관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매일 이렇게 사진을 찍어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외국인의 시각으로 일상을 바라보다
작가는 평소에 사람들을 많이 촬영하려고 하고 있다. 그는 사람을 사진에 담는 것을 누군가는 해야만 할 역사 기록이라 여긴다. 그런데 작가는 요즘 사람을 찍기가 어려워졌다고 한다. 사진에 찍히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사진 촬영을 불쾌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들의 일상을 찍기를 원하는 작가에게는 다소 답답한 일이다. 그런데 외국인들의 경우 사진 촬영에 대한 거부감이 덜한 편이라고 한다. 외국인들은 사진 촬영을 부탁하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포즈를 취해 주기까지 한다.
대체로 사람들은 일상이 기록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 않다. 작가에게 “같은 장소에 매일 가서 도대체 무엇을 찍느냐”고 묻는 이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잘 모를 뿐 우리의 삶은 매일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쌓여 몇 년의 시간이 흘러서 비교해 보면 무엇이 변했는지 드러난다. 작가는 속초가 변해가는 모습들을 아주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이러한 기록들은 사회의 변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사람들은 대체로 사진을 특별한 상황에서 찍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장소에 갔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아니면 행복한 경험을 할 때 사진을 찍는다. 자신이 매일 겪는 지루하거나 혹은 바쁜 일상에 카메라를 갖다 대는 사람은 잘 없다. 이는 한국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작가가 외국을 나가 보면 그 나라 사람들 중에 자신들의 평범한 일상을 사진으로 찍는 경우가 많지 않다. 그런데 외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방문한 타국의 문물들이 특별해 보여 그것을 사진에 담는다. 누군가에겐 별다를 것이 없는 일상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신기한 경험이 되는 것이다. 작가는 기록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외국인의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진작가라면 자신이 일상에서 접하는 것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보다 새롭게 바라보고 그것들을 잘 관찰해야 한다.
<다음에 계속>
이광호 객원기자 campin@hanmail.net
■전태극 작가
·개인전 13회(초대전 4회 포함)
·기획전 11회, 단체전 60여 회
·사진집 – 기억의 편린(2009), 훈춘이야기(2009), 속초의 재발견(2018)
·속초사진아카이브 전임강사
·속초교육도서관 등 출강
·속초문화원 도시변천 기록사업
참여(2013~ )
·2017 강원 민족예술인상(강원민예총)
·제17회 속초시 시민문화상
(문화예술부문. 2005)
·사)한국민족사진가연합 창립 회원(1995∼)
·사)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속초지부 지부장(2001∼2008 4회 연임)
전태극 사진작가.
커다란 가방을 메고 속초해수욕장 해송 숲을 지나는 전태극 작가. 그는 걸어가면서 평범한 것에도 주의를 기울이며 관찰한다.
여명의 시간, 동해를 촬영하고 있는 전태극 작가. 그는 필름카메라를 좋아하지만 휴대폰으로도 사진을 곧잘 찍는다.
2012년 개인전 <경계시대> 전시 작품 ‘철책21-08’.
작가의 세 번째 사진집 <속초의 재발견>에 실린 ‘눈 오는 날, 갯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