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우 교수가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엄복동 자전거를 잡고 사이클 반세기를 회상하고 있다.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보니 엄복동 자전거, 간다 못간다 얼마나 울었나….”
도로에서는 마라톤의 영웅, 손기정이 달리기로 나라 잃은 설움을 날렸다면, 트랙에서는 조선 최고의 자전거 왕, 엄복동이 화살처럼 쏜살같이 내달리며 민족정기를 북돋웠다.
1910~1920년대 일제강점기 자전거 한 대로 한민족을 하나로 묶어냈던 엄복동 자전거가 100년의 세월이 흐른 후 최근 사이클의 고장인 양양과 특별한 인연을 맺으며 새로운 희망의 질주를 준비하고 있다. 조선 최고 엄복동 자전거와 양양을 맺어준 주인공은 바로 김근우 전 한국체육대학 교수.
 
양양고 사이클 창단멤버
 
양양 손양면 상운리가 고향인 김 교수는 양양고 2학년인 1962년 당시 심기연(3년)·최원섭(2년) 등 고교생 2명, 전성국·고창주·신창오 등 중학생 3명 등 5명의 선수들과 함께 양양중고 사이클 창단멤버로 양양사이클의 역사적인 막을 올린 인물이다.
김 교수를 포함한 양양중고 사이클부는 6·25한국전쟁의 상처가 채 가시지 않은 열악한 상황에서 중고 학생체육대회에 처녀 출전해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며 군민들에게 희망을 전해줬다.
1965년 사이클부가 해체되기 전까지 전국을 주름잡던 양양사이클은 당시 주역이던 김 교수가 68년 경희대 체육학과를 졸업하고 이듬해인 69년 모교인 양양중고 체육교사로 부임하면서 재창단의 새로운 전환기를 맞는다. 김 교수가 감독을 맡았던 이때부터 지금까지 양양중고 사이클의 전통은 흔들림 없이 이어지며 전국 도로사이클의 최강으로 군림하게 된다.   
김 교수가 주축이 된 양양중고 사이클부는 1910~1930년대 말까지 조선 최고의 자전거 왕으로 불리며 조선팔도를 내달리던 엄복동의 뒤를 이어 제2의 엄복동이 되고자 신작로 위를 한없이 달렸던 것이다.
김 교수는 1969년 제50회 전국체육대회에 감독으로 출전, 팀을 3위에 올렸다. 이것이 양양고 사이클부의 첫 전국체전 입상이었다.
이어 1970년에는 현재 수산항에서 김선장 횟집을 운영하고 있는 김동일 선수가 고등부 3위를 차지하며 양양사이클의 명성을 전국에 드높였다. 이듬해인 1971년부터는 속초사이클의 대부로 활동해온 함흥냉면 고 이봉섭 사장의 각별한 지원과 관심으로 도약기를 맞았다.
양양고 사이클은 1972년 국가대표로 발탁된 방양호(현 양양군청 건설방재과 방재복구 담당) 선수를 비롯해 뛰어난 선수들이 발굴되며 1979년까지 7년간 전국체전 7연패의 위업을 달성하는 등 전성기를 구가했다.
양양고로 대표되던 양양사이클은 1983년 양양여고 사이클부 창단과 1991년 양양군청 여자사이클 창단으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데 이어 양양실내체육관 및 합숙소 준공 등으로 화려한 발전기를 맞는다.
특히 양양사이클은 군민들의 적극적인 성원과 지원에 힘입어 1992년 제15회 엄복동배 전국사이클대회에 출전해 우승을 차지하면서 선수, 지도자, 지원 등 3박자가 맞물려 전국 최강임을 확인시켰고, 양양여고 사이클부도 1993년부터 2002년까지 각종 대회를 휩쓸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1962년 달랑 6명으로 창단한 양양사이클은 현재까지 국가대표 18명, 주니어대표 17명 등 총 140여명의 사이클 선수를 배출했으며, 자타가 인정하는 한국사이클의 산실로 반세기의 수레바퀴를 써내려가고 있다.
양양사이클 반세기의 산증인 김 교수는 선수에서 지도자로 그리고 서울시사이클연맹 회장, 대한사이클연맹 이사 등을 역임하고 스포츠 경영학자로 활동하며 한국사이클의 중심으로 우뚝 섰다.
“자전거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김근우가 함께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체육계에서는 소문난 자전거 광이다.
자전거를 처음 탔던 1962년 초창기, 변변치 못한 자전거로 선수생활을 했던 그는 사이클은 장비와 지원, 노력이 조화를 이뤄야 좋은 기록을 낼 수 있다는 신념으로 선수들을 지도했다. 선수와 지도자 생활을 거쳐 체육행정 전문가로 활동해온 김 교수는 서울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서 사이클경기를 훌륭히 치러내며 능력을 인정받아 미연방체육대학원 교육학박사학위까지 취득하는 등 스포츠 학자로서 입지를 굳혔다.
하지만 그에게는 한 가지 아쉬움이 있었다. 조선 최고의 엄복동 자전거를 복원해 한국사이클의 역사와 전통성을 되살리는 일이다.
 
 

문화재 466호로 등록된 엄복동 자전거.


양양사이클의 시초인 양양중고사이클 창단멤버. 왼쪽부터 신창오·고창주·심기연·김근우·최원섭·전성국.

 
엄복동 자전거와의 특별한 인연
 
1892년 서울 중구 오장동에서 태어난 엄복동은 165cm의 작은 체구지만 일본인이 경영하는 경성수입자전거 대리점인 ‘일미상회(쌀가게가 아님)’에서 점원으로 일하면서 자전거를 처음 접하게 됐다.
그 후 1910년 훈련원(현 국립의료원)에서 개최된 전조선자전거대회에서 우승한 뒤, 1930년대까지 20년간 조선팔도를 누비며 자전거 왕으로 나라 잃은 슬픔을 희망으로 가꿔나갔다.
당시 엄복동의 경기를 보기 위해 용산 육군연병장에 10만명이 몰렸을 정도로 당대 최고의 스포츠 스타였다(지금으로 치면 김연아보다도 더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엄복동은 1910~1911년도에 제작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영국 러쥐사의 자전거 1대를 수입한 일미상회의 대표선수(지금으로 보면 실업선수에 해당)로 활동하며 조선팔도를 발 아래 두고 누볐다.
세계적인 최신식 자전거를 광고하기 위해 제작된 자전거가 일본 동경을 거쳐 엄복동을 통해 조선 최고의 자전거로 변모해가며 일명 ‘엄복동 자전거’로 불리게 된다.
엄복동 자전거는 그가 은퇴한 뒤 가장 아끼던 후배 조수만에게 물려주었고, 그 뒤 후배인 박승렬 선수에게 당시 500원(금1백 돈쭝 상당)에 팔렸다. 박 선수는 동생인 박성렬에게 엄복동 자전거를 줬고, 그는 사이클의 원로로 소중하게 보관해 오다 타계했다. 그 후 김근우 교수가 역사적 가치와 문화재적 소중함을 알고 미망인으로부터 양도받아 문화재로 등록하기에 이른다.
엄복동 자전거는 드디어 2010년 8월 24일자로 등록문화재 제466호로 등록됐다.
김 교수는 “태어나 지금껏 살면서 내 고향 양양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많이 고민하고 생각해왔다”며 “연어가 고향인 남대천을 향해 기나긴 여정에 오르듯 오늘 내 고향 양양에서 살고 죽기를 위해 열심히 헌신하고 마지막 봉사를 하겠다”고 피력했다. 
20세기의 끝에서 출발한 100년 전의 엄복동 자전거가 다시 21세기의 시작에서 내달리면서, 지역에서는 올해 완공되는 양양벨로드롬 경기장 준공에 맞춰 김 교수가 소장한 엄복동 자전거를 양양으로 유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전국 사이클의 고장인 양양군의 위상을 높이고 스포츠마케팅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엄복동 자전거를 가져와 이참에 자전거박물관을 조성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하게 일고 있다.
이에 설악신문은 만세운동의 고장이며 전국 최고의 사이클을 자랑하는 양양군이 다시 한 번 대내외에 민족정기를 되살리며 사이클 거점도시로 도약하기 위한 캠페인을 양양군민들과 함께 전개할 계획이다.            
 
김주현 기자 joo6952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