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일제치하의 조선 여성은 이중 삼중의 억압에 시달려야 했다. 일제의 착취와 수탈에 덧붙여, 가부장적인 사회의 봉건적 억압으로 교육과 취업에서의 불평등은 물론이며, 가정과 사회 모든 분야에서 억압된 삶을 살아야 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적인 봉건적 억압을 과감하게 떨치고, 식민지 여성의 해방을 위해 여성운동의 한 길로 나섰던 사람이 바로 양양의 조원숙(趙元淑, 1906~?)이다. 조원숙은 우리나라 여성운동의 한 축인 사회주의 계열의 여성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양양군 현남면 포매리가 고향인 조원숙은 1924년 우리나라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시초가 된 조선여성동우회 결성에 참여했으며, 1927년에 결성된 여성운동 단일조직인 ‘근우회’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특히 조원숙은 같은 여성운동가들 중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봉건적 삶을 능동적으로 거부하고 여성운동의 길로 나섰다는 점에서 당시 언론으로부터 크게 주목을 받았다.
15살에 야간 도주, 상경 유학
“나의 시골집은 강원도의 작은 읍인 양양입니다. 교통 불편은 물론이고, 집안도 구식가정으로 행세나 하는 가정인 까닭에 남자의 유학도 잘 허락하지 않거든 어찌 여자의 유학이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서울로 유학하고 싶은 생각이 봄불 타 오르듯 하여 자나깨나 밤낮으로 공부하러 갈 생각뿐이었습니다. 어떤 때에는 며칠씩 밥도 잘 안 먹고 심지어 병까지 난 일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열다섯 살 되든 해 5월 14일 밤이었습니다. 나는 아주 죽기까지 결심하고 도망가는 과부모양으로 봇짐을 싸가지고 부모도 친척도 동네사람들도 다 모르는 중에 교군(轎軍,가마꾼) 하나를 잡아타고 표연히 집을 떠나서 양양과 강릉의 접경지 되는 지경리까지 와서 가마에서 내렸습니다. 그때는 마침 춥지도 덥지도 않은 첫여름의 보름밤이라 중천의 둥근달은 초롱같이 밝고 만산의 무르녹는 새 녹음은 그림의 족자와 같은데 나의 시원하고 상쾌한 마음이야 어찌 다 말씀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마치 옥중에 있던 죄수가 옥문을 나오고 통속에 있든 새가 공중으로 날아가는 것 같았습니다.”-1927년 8월 17일 잡지 ‘별건곤’ 기사를 재정리
1906년 양양 포매리에서 태어난 조원숙은 15살에 서울로 공부하러 가기 위해 가출을 했다. 그의 고향인 포매리는 한양조씨 집성촌으로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에 감히 여자가 신학문을 하겠다고 엄두를 낼 수도 없는 분위기였다. 당시의 가출에 대해 일부 언론에서는 “집안에서 강제로 결혼을 정해놓아 혼례 전날 밤에 시집가기 싫다고 서울로 도주하여 온 통괘한 여성”이라고 하기도 했다.
사회주의 여성운동단체 결성 주도
고향을 등지고 가출한 조원숙은 서울에서 근화학원(덕성여대의 전신)을 다녔다. 그러나 2학년을 다니다가 동맹휴학을 주도하여 퇴학을 당했다. 이후 조원숙은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운동과 여성운동에 나서게 된다.
우선 우리나라 여성의 굴레를 상징하는 삼단머리를 잘라내어 단발여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24년 5월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운동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 결성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1926년 6월 제 2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에 연루되어 일본경찰에 검속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당시 그의 오빠인 조두원(趙斗元)은 사건이 터지기 전에 중국 북경으로 피신하였으나 여동생 조옥화와 부친 조석구는 조원숙과 함께 체포되기도 했다.
조원숙은 1927년 4월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통합조직인 중앙여자청년동맹의 집행위원을 맡았으며, 5월에는 기독교계열 여성운동과 사회주의 여성운동이 힘을 합친 ‘근우회’ 결성에 나서 집행위원 및 서무부원을 맡았다.
근우회는 1931년 해소될 때까지 여성문제에 대한 토론회와 강연회 개최, 야학 실시, 문맹퇴치 및 여공파업 진상조사, 항일학생운동 지원 등 활동을 펼쳤다. 근우회는 전국에 70여개의 지부를 두었으며, 회비를 내는 회원수만 2천9백여명이 이르렀다. 근우회는 일제의 탄압과 좌우분열 등으로 해소되었지만, 우리나라 여성운동사에서 획기적인 단체로 평가받고 있다.
미모와 활동에 대한 언론의 관심
근우회 활동으로 사회에 알려진 조원숙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각별했다.
“근우회에서 미인이 누구냐 하면 그를 가르켰고 또 충실한 일꾼이 누구냐 하면 역시 그를 가르켰다. 그러나 풍염한 얼굴과 어글어글한 눈, 단발의 미, 좋은 체격 등 모든 조건은 이성의 사람을 끌기에 너무 충족하여 일하는 전도에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 -별건곤 1932년 11월 1일자 ‘사랑이 잡아간 女人群’
“조선여성동우회 당시에 미인으로 평판이 자자하든 그는 ... 그리하야 근우회의 집행위원으로 어디를 가든지 대모테안경에 기름한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은 곳이 없더니... -삼천리 1932년 7월 1일
조원숙은 다른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들이 그러하듯 사상적 동지를 남편으로 맞았다. 조원숙은 경남 통영 거제도 출신으로 북경대학을 나온 양명(梁明)과 결혼했다. 양명은 고려공청 책임비서를 지냈으며, 결혼 당시 조선일보 기자를 지냈다. 양명이 조선공산당 재건사건에 연루되어 북경으로 망명하자 조원숙도 따라갔다. 중국 상해에서 딸 아이를 낳은 조원숙은 양명과 계속 지내기 어려워 귀국해 시집인 통영과 친정인 양양에서 지냈다. 근우회의 맹장이라고 했던 조원숙의 변한 모습에 모두들 놀랐다.
“지난 4월말에 우연히 京城驛에 나갔다가 머리는 흩어지고 어린아이는 등에 업고 고무신에 낡은 치마, 그리고 치마안으로 보이는 돈주머니, 그 초초한 행색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미인에 모양내기로 유명하든 그가 이제 웬일일까?”  - 삼천리 1932년 7월 1일
해방 후 조선부녀총동맹 활동
조원숙의 행적은 해방 후에 다시 확인된다. 해방직후인 1945년 8월 17일 일제시기 근우회에서 활동하던 여성활동가들이 주를 이루고 사회주의계와 기독교계 여성 지식인들이 모두 참여해 건국부녀동맹을 결성했다. 여기서 조원숙은 집행위원을 맡았다. 건국부녀동맹은 그해 12월 조선부녀총동맹(약칭 부총)으로 개편되었다. 전국에 80만명의 회원을 두게 된 부총은 남녀 평등 선거권과 피선거권, 여성의 경제적 평등권과 자주성 확립, 남녀 임금 차별제 폐지, 모자보호법 제정, 봉건적 결혼제 철폐를 내걸고 운동을 벌였다. 조원숙이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한 부총은 활발한 운동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의 탄압으로 활동이 위축되고 말았으며, 한국전쟁을 전후로 남한에서의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맥이 완전히 단절되고 말았다.
조원숙도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된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행적에 대한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엄경선 프리랜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