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 끝없는 바람, 저 험한 산위로 나뭇잎 사이 불어가는, 아~자유의 바람…” 젊은 시절 좋아하던 가수 김민기의 ‘바람과 나’라는 노래의 첫 구절이다. 어쩌면 그 때는 대중가요의 노래가사가 거의 시라고 불려도 좋을 만큼 아름다운 가사들이 많았다. 이어지는 그 노래의 가사 중에는 “하늘위로 구름 따라 무목여행(無目旅行)하는 그대~”라는 대목이 나온다. 무목여행… 말하자면 목적지와 일정을 정하지 않고 발길 닿는 대로 떠나는 여행을 지칭하는 것이리라.
비교적 쉼 없이 바쁘게 살아왔던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면, 아름답게 되새김질 되는 추억 중에는 내 젊은 어느 날 불현 듯 떠났던 무목여행의 추억이 있다.
군 제대 후 복학하기는 했으나, 전공에 대한 취미도 의욕도 없었고 미래를 조망할 어떤 비전도 갖추지 못한 채, 의미 없이 반복되는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등교하던 중이었는데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문득 어디로든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 길로 수업은 빼먹은 채 무작정 서울역으로 갔다. 서울역에 도착해서는 그 시간대에 출발하는 아무 기차나 잡아타야지 했는데 그게 대천역으로 가는 장항선 열차였다. 처음 타보는 장항선 열차의 생경스러움을 느끼면서 도착한 대천역. 어디로 가야할지 망설이다가 역에서 가까운 대천항으로 갔다. 이번에는 배를 타고 가보리라 생각하고 그 시간대에 맞는 아무 노선이나 골랐는데 그것이 삽시도를 경유하는 노선이었다. 섬 이름도 특이했고 동해안에서 살아온 나는 섬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했기에 낯설음이 설렘을 동반하면서 가슴이 뛰었다.
삽시도행 배는 장고도, 고대도 등의 다른 섬들을 거쳐 가는 연락선 같은 배였다. 항구를 떠난 지 삼사십 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거침없이 파도를 헤치며 나가는 배의 뱃머리에서 서해의 풍광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 있는데, 대학생처럼 보이는 한 청년이 다가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배에 탈 때 일단의 대학생 무리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 한명인 것 같았다. 자신을 00대학교 미생물학과 2학년 과대표라고 소개한 그는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내게 삽시도로 왜 가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를 물었다. 아마도 가방 하나 덜렁 둘러메고 혼자 여행을 하고 있는 내게 관심이 생겼던 모양이었다. 대화 끝에 그는 자기들이 삽시도로 MT를 가고 있는 중이며 자기들의 일정에 합류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혼자 여행을 떠난 나로서는 재밌을 법도 한 일이어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삽시도에 도착한 우리(?)는 항구에서부터 MT 장소로 정한 숙소까지 경운기를 타고 이동했다. 대중교통이랄 것도 없는 섬에서 이동수단으로 이용되는 경운기가 재밌게 느껴졌다. 숙소에 도착해서는 그들의 일정에 맞춰 편성된 조에서 조금은 어색함이 동반된 조원이 되어 찌개도 끓이고 허드렛일도 하면서 차츰 그들과 동화되기 시작했다. 식사를 하면서 술이 한 순배 두 순배 돌아가고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오갔다. 그들은 나보다 어렸으므로 나를 형, 또는 오빠라 지칭하며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되었다. 이윽고 MT의 하이라이트인 캠프화이어가 펼쳐졌다. 달빛이 교교히 바다 물결에 흐르고 희고 넓게 펼쳐진 백사장에서 펼쳐지는 캠프 화이어는 지금 생각해도 정말 멋진 광경이었다. 노래도 하고 춤도 추면서 그들과 아주 짧은 시간에 하나가 되었고, 술이 얼콰하게 취한 그들은 하나 둘씩 내게 와서 연애와 진로 고민 등 나도 풀 능력이 없었던, 어쩌면 내 고민과도 같았던 질문들을 던지며 상담을 요청했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내 나이도 그들보다 겨우 두서너 살 많았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 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답변들을 해주고 같이 공감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밤이 이슥해져서야 자리를 파하게 되었다.
계속 그들과 일정을 함께 할 작정은 아니었기에 다음날 아침 아쉬운 작별을 하고 섬을 먼저 떠나 다시 대천항으로 향했다. 그 다음날도 여전히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발길이 닿는 대로 나의 무목여행은 더 이어졌었다. 하지만 삽시도에서의 1박2일은 그 당시 내 무목여행 여정의 하이라이트였고, 그 이후로도 몇 번 더 비슷한 유형의 무목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기도 했었다.
휴가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요즘에는 좀 더 편안한 휴가를 위해 인터넷을 비롯한 여러 경로를 통해 여행지에 대한 정보와 숙소, 맛집, 구경거리 등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꼼꼼히 계획하고 예약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휴가에는 막연하게 아무 준비도 없이 무작정 발길 닿는 대로 한번 떠나 보는 것은 어떨까? 편안함과 익숙함으로부터의 탈피, 새롭고 낯선 경험이 여행의 목적이라면 무목여행은 분명 잘 짜여 진 여행과는 비교할 수 없는 어떤 색다른 경험치를 우리에게 선사할 것이다.
역마살이 낀 것일까? 지금도 바람처럼 어디론가 멀리 멀리 떠나고프다.
전형배
데일리F&C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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