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
뉴스홈 > 인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쪽지신고하기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기사스크랩 이메일문의 프린트하기
탈북 머구리 박명호의 살아온 이야기<9> - 한국 도착 후 겪은 일들
‘남쪽에도 옹진이 있다고?’
등록날짜 [ 2018년04월23일 12시25분 ]

박명호 씨는 자신의 배가 마침내 남쪽 수역에 들어왔다고 판단하고서도 한참을 남쪽으로 향해 나아갔다. 북한 바다와는 달리 바닷물에서 석유 냄새가 나고 플라스틱 병 같은 쓰레기들이 보여 그는 남쪽 바다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그가 남쪽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은 대략적인 추측일 뿐이었다. 나침반이 시원치 않아 정확한 위치를 가늠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낮 한 시쯤에 섬 하나를 발견하고 드디어 상륙했다.

한 노인 만나 “북쪽에서 왔어요”
육지에 올라오니 사람들이 보였지만, 아무도 그들 가족을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한 노인에게 가서 말을 건넸다.
“여기가 어딥니까?”
“옹진이요.”
박 씨는 이 말에 놀랐다. 자신이 북한의 옹진을 떠나 남으로 내려왔는데 옹진이라니……. 그가 가진 1960년대 남쪽 지도에서 옹진을 본 기억은 없었다.
노인이 질문을 던졌다.
“어디서 왔소?”
박 씨가 대답했다.
“북쪽에서 왔어요.”
“연평도요?”
“아니요. 그 위쪽이요.”
“그럼 백령도?”
“아니요, 그보다 위쪽이요.”
그러자 노인이 놀란 듯 중얼거렸다.
“아니, 그럼 북한인데…….”
“네, 거기서 왔어요.”
이 얘기를 들은 노인은 놀란 표정을 짓다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식당으로 박 씨의 가족들을 데리고 갔다.
얼마 안 있어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마을 주민들과 함께 술도 마시며 왁자지껄 많은 얘기를 나눴다. 마을 사람들은 자기네 동네에 잠수부가 없으니 이 동네에서 같이 살자고 말하기도 했다. 박 씨는 밥을 얻어먹었으니 이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에 쌀을 가져 오려고 자신이 타고 온 배로 갔다. 이때 동네 사람들도 함께 그 배로 따라와 신기한 듯 배를 구경했다.
그때쯤 해경이 섬에 도착했고 박 씨 가족들을 해경 배로 태웠다. 배를 타려는데 해경들이 박 씨에게 총을 겨눴다. 박 씨는 마을 사람들과 즐거운 마음으로 밥과 술을 나눈 상태에서 적잖이 놀랐다고 한다.
인천 해경본부에 가서 탈북 경로에 대한 조사를 받았다. 박 씨는 남쪽 경비정이 자신의 배를 적군으로 오인할까 두려워 남쪽 경비정마저 경계하며 내려왔다. 그래서 자신이 지나온 경로를 담당하던 해경들이 혹시 문책을 받으려나 걱정이 됐다 한다. 그래서 탈북 경로를 애매하게 설명하며 넘겨 버렸다. 그러는 사이 국가정보원에서 사람이 나와서 함께 그리로 이동했다.
국정원으로 가는 길에서 본 남쪽 풍경은 밤인데도 너무 밝아서 박 씨는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배를 만드는데 전기가 없어 손으로 선반을 돌렸는데 남쪽 사람들은 전력 낭비가 너무 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국정원에서는 몇 주 정도 조사를 받았다. 그를 담당하는 국정원 직원들은 무례하지 않았고 장교 출신인 그를 대우해줬다. 그런데 국정원에 가서 처음 밥을 먹을 때 한국의 상황에 대해 잠깐 오해한 일이 있다. 국정원 직원이 배식판에다 식사를 챙겨서 가져다주어 국정원에서 첫 끼를 먹게 됐다. 그런데 밥과 반찬의 양이 자신이 보기엔 너무 적었다. 그때 박 씨는 한국도 경제가 어려워 식사량을 적게 해서 주는 건 아닌가 하고 잠깐 오해를 했다고 한다. 북한의 경제 사정이 어려워 탈북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밥의 양이 적은 것이 당황스러웠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나원 퇴소 후 정착지로 용인 선택
국정원에서 조사가 끝난 이후에는 북한 이탈주민을 위한 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 지냈다. 처음 2개월은 한국 사회에 관한 교육이 진행됐다. 민주주의 제도와 우리 역사에 대해 배웠고 영어와 컴퓨터에 대해서도 조금씩 배웠다.
그리고 마지막 한 달은 직업교육이 이뤄졌다. 그런데 박 씨는 한 달 동안의 직업 교육이 무슨 효과가 있겠냐며 안가겠다고 버텼다고 한다. 박 씨는 지금 생각해도 자신의 판단이 틀린 게 아니라고 보고 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구직 활동과 취직 준비를 열심히 해도 취업이 쉽지 않은데 한 달 동안의 직업 교육으로 탈북자가 어떻게 한국 사회에 적응하겠냐는 것이다. 박 씨는 사회로 나가기 전에 가족들과 쉬면서 시간을 보내려 했지만 하나원에서는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박명호 씨가 우리 사회에서 처음으로 펼친 주장이 묵살된 것이다.
박 씨는 가족들과 떨어져 시흥으로 가서 용접 교육을 받았다. 북에서 공병이었던 자신이 다 해본 일이라 굳이 그가 직접 나서서 실습을 할 필요는 없었다. 아쉽지만 하나원에서의 교육 과정은 그렇게 마무리됐다.
 하나원을 퇴소하면서 박명호 씨는 정착지로 용인을 선택했다. 가족 1인당 600만원씩 받았고 용인의 임대아파트에 살게 됐다.
 박 씨는 그동안 정착금 600만원을 시샘하는 사람도 적지 않게 봤다. 그러나 그는 그럴 때면 하나원에서 한 공무원이 얘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그 공무원의 얘기는 대충 다음과 같다.
 “600만원은 대한민국 사회에 정착할 수 있는 돈이 아닙니다. 북한 국민도 우리 국민인데 대한민국이 지금까지 북한의 주민들을 국민으로 대우하지 못하고 방치한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러분이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를 찾아와 준 것은 너무 고마운 일입니다. 정착금 600만원은 여러분을 그동안 국민으로 대우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작은 위로금으로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음에 계속>
구술 박명호·정리 이광호 객원기자

 

이광호 (campin@hanmail.net) 기자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좋아요 0 싫어요 0
관련뉴스
- 관련뉴스가 없습니다.
오동환 교수, 세계 3대 인명사전 등재 (2018-04-23 12:30:46)
하명호 속초상공회의소 회장 연임 (2018-04-16 14:04:43)
오색케이블카사업 잇단 승소로 ...
고성군에 전입하면 1인당 20만원...
김준섭 도의원, 동서고속철 비대...
주민들 스스로 ‘아름다운 마을 ...
양양군, 특색 있는 농어촌 마을...
노후경유차 폐차·매연 저감장치...
1
열정 가득한 한겨울 오전의 ‘줌바댄스’ 현장
오전 9시 반, 속초 중앙로 윤경숙줌바댄스학원. 수십 명의 사람...
2
바다 속 배 밑에 엉킨 폐그물 제거…“여자...
3
제1회 속초시 발달장애인 자기권리 주장대...
4
속초, 문화로 거닐다<167> / 간판이...
5
동해고속도 속초 진입도로 직선화 난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