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어업협정이 체결된 1965년은 전국이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의 목소리로 들끓었다. 수복지구라 정치적 불모지였던 속초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미 동해안 어업전진기지로 자리잡은 속초항에서도 평화선 철폐와 한일어업협정 체결은 민감한 시국사안이었다.
1965년 3월과 4월, 당시 야당이었던 민정당과 민주당은 대일굴욕외교반대투위를 결성해 전국 순회 집회를 개최했고, 속초에서도 대중집회를 개최했다. 이에 질세라 당시 여당이었던 공화당도 속초에서 맞불 지지집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투위 한일회담 저지 지방강연회
[속초] 동해안 최대의 어항인 이곳 속초에서 민정당 부총재인 전진한씨를 비롯한 김윤식 정연국 함종빈씨 등 민정, 민주 두 야당 투위 연사들은 28일 하오 1시30분 시 공설운동장에서 약 2천명에 가까운 군중이 모인 가운데 “우리의 영해인 평화선은 생명선인만큼 국민 전체가 이를 사수하는데 총궐기해야한다”고 주장했다.
<1965년 3월 29일 경향신문 1면>
이날 집회는 같은 날 동아일보에서도 크게 다뤘는데, 야당의 집회를 집권여당에서 조직적으로 방해했다고 보도했다. 기사에서는 “28일 오후 1시부터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대일굴욕외교반대강연회’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교육공무원과 의용소방대 및 각급기관 공무원을 설악산 도로사업에 동원했고, 속초고등학교는 일요일임에도 학생들이 야당 강연회장에 가지 못하도록 지시했으며, 집회 주최 측이 연사를 환영한다는 내용의 플래카드를 들고 강연회장으로 가다가 사복경찰의 제지를 받았다”고 보도했다.
일주일도 안 되어 여당 측도 속초에서 대중집회를 열었다. 4월 5일자 동아일보 1면에는 “속초시 공설운동장에서 4일 상오 11시 전례용, 민병권씨 등을 비롯한 정부 여당측의 유세가 1천5백여 시민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고 보도했다. 신문기사에서는 “청중들은 거의 다 고성군 속초시 양양군 관하의 각급기관 공무원들이었다”고 덧붙였다.
1965년 6월 22일 체결한 한·일어업협정은 5·16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이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체결한 굴욕협정으로 평가받고 있다. 국제 원조와 정치지원 자금 등을 대가로 10년 넘게 유지해오던 평화선을 철폐해 우리 해역을 일본에 내준 것이 핵심 내용이다. 당시 이 굴욕적인 협정에 정치자금이 오갔을 것이라는 말이 무성했는데, 결국 1966년 3월 18일자 미국 CIA 보고서에 “일본기업들이 61년~65년까지 당시 민주공화당 총예산의 3분의 2를 제공했다(6개 기업이 총 6600만 달러 지원)”는 내용이 실렸음이 2005년에 확인되었다.
우리 해역에 일본 저인망어업 허용
1952년 1월 18일 한국 연근해 어자원의 보호와 일본의 자원 침탈 방지를 위하여 공포한 평화선(이승만라인)은 동해안에서는 울릉도와 독도까지도 포함한 수역으로 연근해 어민의 생명선이며, 수산 식량 자급을 위한 해양주권 선언이라 평가를 받았다. 1952년 평화선 선포 이후 3백28척의 일본 어선이 나포되어 3천9백29명의 일본인을 억류했다. 이 과정에서 모두 44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한때 세계 제1위의 수산강국이었던 일본으로서는 평화선의 존재가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공화당 정권은 평화선을 철폐하고, 대신 전관수역 12해리(22.224km)만을 우리 독점구역으로 정하고, 그 외는 공동규제수역으로 정해서 일본의 기선저인망어업(소위 바다의 갱)까지 허용하였다. 타국의 저인망을 자국 해역에서 허용하는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울러 평화선을 포기하면서 독도 영유권 논란의 불씨를 다시 살려놓게 되었다.
196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4월 6일 오전에는 공화당 김종필 의장이, 4월 9일에는 신민당 윤보선 대통령후보가 속초중학교에서 수산진흥 공약을 내걸고 유세를 펼쳤다. 평화선 철폐와 한·일어업협정 논란 등으로 수산업 관련 쟁점이 가장 두드러진 대통령선거였다.
한․일어업협정으로 지역 수산업에는 긍정과 부정의 영향이 함께 있었다. 한·일어업협정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진행된 수산업 근대화사업으로 어선과 어항시설이 크게 개선되었으며, 연근해 오징어 고갈에 따른 대체어장을 일본쪽에 가까운 공동규제수역인 대화퇴어장에서 찾을 수 있었다.
반면 한 때 세계 1위 수산강국이었던 일본은 1974년 한해 한국 근해에서 연간 60만톤 이상을 어획했다는 통계도 있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 해역의 자원고갈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한·일어업협정 체결에 따른 영향과 관련해 1970년 5월 1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동문성 기자의 현장르뽀 ‘빼앗긴 새 황금어장’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사에서는 “명태어장을 찾아 지난달 중순 독도 근해로 출어했던 어선 5백여 척이 장비 부족과 일본 대형어선에 밀려 고기떼를 눈앞에 두고 되돌아섰다”고 했다. 당시 수산진흥청은 독도 동쪽 10마일 일대에 새 명태어장을 발견했으나 10~20톤급 어선들로서는 출어하기에 너무 먼 거리이고, 일본 어부들이 3백톤급 트롤어선을 몰고 위협해와 조업에 지장을 받아서 보름만에 철수를 했다고 한다.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어선 건조
한편, 한․일어업협정 체결 이후 속초지역에서도 수산근대화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65년 11월 23일 속초 제일극장에서 강원도 어민 1천여명이 모여 강원도수산진흥 어민대회를 개최했다. 평화선 포기 등으로 악화된 민심을 수습하려는 기획행사였다. 이날 대회에서 어민들은 수산 부문에 쓰일 청구권 자금을 강원도에 중점 투자해야한다고 요구하고 7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하기도 했다. 1966년 6월 15일 강원도지사가 속초방송국 공보관에서 강원도내 어업조합장 등을 모아놓고 청구권자금 1차년도 사용계획 물량과 어선 건조 사업자를 선정했다.
드디어 1967년 4월 14일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20톤급 유자망 어선 19척의 진수식이 속초항 부둣가에서 정일권 국무총리와 수산청장, 박경원 도지사가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그리고 8월 3일에도 5톤급 디젤엔진 소형어선 12척, 11월 13일에는 50톤급 대형어선(경북 강구어협 조합장 발주) 1척의 진수식이 열렸다. 이 작업들은 1966년 청구권 자금 1차년도 어선건조 몫이었다. 당시 어민들은 자체 부담금(15%)을 납부하지 못해 몇 달간 어선을 조선소에 방치하기도 했다고 한다.
1969년 4월 15일 대일청구권 자금을 지원받아 속초수협 속초수산센터가 문을 열었다. 위판장과 1층 건물 1채와 2층 건물 1채, 공판장시설, 급수와 급유시설, 무선국, 보건후생시설 등을 갖췄다.
이 시기 속초의 선박 건조는 대일청구권 자금보다는 수해복구작업의 영향이 더 컸다. 속초의 어선 건조는 1968년 10월에 있었던 68해일 재해복구 때 사상 최대 규모로 진행됐다. 1968년 10월 24일 속초를 비롯한 동해안 일대에 해일이 밀어닥쳐 사망자 27명, 이재민 3만6천여명, 선박피해 3천여척, 건물피해 4천여동 등 피해가 발생했다. 수해가 발생하자 바로 재해주택 건설에 들어가 만 46일 만에 고성 685동, 속초 825동을 비롯해 총 2천동의 재해주택을 준공해서 12월 18일 입주식을 거행했다. 아울러 속초재해복구 어선건조단지에서 208척의 동력선을 동시에 건조하기 시작해 다음해 5월 20일 진수식을 가졌다. 1969년 5월 20일 매일경제신문에서 208척의 어선 진수식을 상세히 보도했다. 이날 합동진수식은 수산청장과 수협중앙회장과 함께 3천명의 지역어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동력선 2백8척 말고도 1천7백척의 무동력선도 같은 시기에 건조했다.
이 무렵 바다 목장화 사업이 속초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1967년 10월 31일 속초 외옹치 일대에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인공어초가 투입되었는데, 강원도가 도비 55만원을 들여 사방 1.5미터, 무게 1.5톤의 인공어초 125개를 제작했다. 다른 관점으로 보면, 바다 목장화 사업이 시작될 정도로 동해안 어자원 고갈 문제가 이때부터 심각해지기 시작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미 명태와 오징어 자원의 고갈 문제가 심상찮게 나오기 시작했다.
엄경선 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1967년 4월 14일 열린 대일청구권 자금 어선 준공식과 속초수산센터 건립 기공식. 국가기록원 홈페이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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