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체제 대립이 심해도 그렇지, 어떻게 한 가족 피붙이가 수십년 간 서로 생사조차도 알 수 없는 긴 시간을 보내야 했을까? 작고한 실향민 출신 작가 이반은 2009년 11월 9일자 <설악신문>에 “인도(人道)가 아니라 인권(人權)이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올려 이산가족의 아픔에 대해 절규했다.
“… 땅으로 기어 다니는 벌레도, 들로 다니는 짐승도, 하늘의 새도, 바다 속의 물고기도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온다. 그런데 이 땅의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가지도, 오지도 못한다. 그런 면에서 벌레나 짐승이나 바다 속의 오징어나 양미리보다 못하다. … 보고 싶은 것을 보고, 가고 싶은 곳으로 가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있어야 되는 것은 인간의 기본 권리다. 21세기 초에 살면서 이 기본권을 박탈당하고 사는 사람들이 이 한반도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다. 이산가족 문제는 인도적 문제가 아니라, 인권의 문제다. …”
1985년 9월 남북한 이산가족 고향방문이 처음으로 이뤄진 이후, 15년 만인 2000년 8월 15일 다시 이산가족 방문단이 서울과 평양으로 오갔다. 그로부터 2018년까지 총 21차례 대면상봉과 7차례 화상상봉이 이뤄졌다. 그러나 2008년 남북관계가 경색된 이후 12년 동안 금강산에서 4차례 대면상봉이 이뤄졌을 뿐이다. <설악신문> 30년의 기사 속에 영북지역 이산가족 상봉의 역사가 담겨 있다.
남북정상회담 후 아바이마을 상봉기원제 지내
1990년부터 이산가족 상봉 추진이 시작되어 실제 상봉이 성사되기까지 10년의 시간이 걸렸다. 1990년 8월 20일 <속초신문> 1면에서는 정부가 무제한 방북을 허용하면서 방북신청을 받았는데, 속초에서는 3백87명이 방북신청을 했다고 보도했다. 이때 북한의 반응이 없어 실제 방북이 이뤄질지 현실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2년 후인 1992년 5월 18일자 <속초신문> 6면에는 7차 고위급 회담에서 남북이산가족 교환방문을 합의했다는 소식이 지역 실향민의 반응과 함께 실렸다. 지역에서는 1백명 규모에 서울과 평양 방문으로 한정한다는 합의 소식에 실망의 분위기가 역력했다. 6월에는 방문단 신청을 받았는데, 영북지역 70세 이상 이산가족 92명이 접수를 했다. 양양읍 청곡리 조생금(98세)씨도 북에 두고 온 아들을 죽기 전에 한번이라도 만나고 싶어 방문신청을 했다. 하지만 이때 합의한 이산가족 교환방문은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1994년 8월 1일부터 이산가족 및 재북주민접촉신청서를 시군 평화통일자문회의에서 받았다. 속초에서는 월남 실향민 출신인 여석창 속초시의원이 가장 먼저 신청서를 접수했다.
2000년 6월 19일자 <설악신문>에서는 6월 15일 개최된 남북정상회담 소식을 청호동 아바이마을의 반응과 함께 보도했다. 청호동 노인회관에 모인 실향민들은 TV를 통해 정상회담 소식을 접하고 이제야 고향땅을 한번 밟을 수 있게 되었다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정상회담에서 광복절 무렵에 이산가족 상봉을 합의하자 다음날인 6월 16일 오후 4시 실향민들은 노인회관 앞에서 ‘이산가족 상봉 기원제’를 열고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2000년 7월 17일자 <설악신문>에서는 8월 15일 남북이산가족 첫상봉을 앞두고 방문단 추첨으로 선정된 실향민이 안타깝게도 이미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대한적십자가 컴퓨터로 추첨해 4백명 중에 속초에서는 유일하게 대포동 전광수씨가 선정됐다. 그러나 1995년 방북신청을 했던 전씨는 이미 작고한 후였다. 전씨는 함북 성진이 고향으로 전쟁 중에 부친과 부인, 자녀 둘을 놔두고 홀로 피난을 내려왔다.
영북지역 최초 상봉자 고성 문정자씨
서울서 큰 오빠 문병칠씨 만나
2000년 8월 15일 남과 북에서 각각 1백명의 이산가족이 서울과 평양을 방문해 역사적인 남북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졌다. 영북지역에서는 고성군 죽왕면 인정리에 사는 문정자(60세)씨가 북한에 사는 큰 오빠 문병칠(68세)씨의 신청으로 서울에서 첫 이산가족 상봉을 이뤘다. 상봉에 앞서 7월 16일 인정리에 사는 문씨의 모친 황봉순(90세)씨는 북에서 보낸 이산가족 명단에 큰아들 문병칠씨가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나흘 만에 사망해 끝내 상봉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도 유족들은 “할머니가 큰 아들의 생존소식을 확인하고 눈을 감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위안을 삼았다. <설악신문>은 상봉을 앞두고 사망한 황봉순씨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보도했으며, 문정자씨의 상봉 이야기도 두 차례에 거쳐 자세히 보도했다.
문정자씨는 8월 15일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남쪽에 사는 형제들과 함께 큰 오빠 문병칠씨를 만났다. 동생들을 만난 문병칠씨는 어머니 황봉순씨의 사망소식을 전해 듣고는 “50년을 기다려 왔는데 26일을 못 기다리고 세상을 떠났느냐”며 울먹였다. 문씨는 한국전쟁이 나던 1950년 춘천농고 재학 중에 북으로 끌려가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다. 상봉 당시 황해남도 농업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상봉 기간은 단 나흘. 상봉 다음날인 16일 문병칠씨 형제들은 돌아가신 어머니께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50년간의 불효를 대신했다고 <설악신문>은 전했다.
설악권 두 번째 이산가족 상봉자로 양양군 현북면 말곡리에 사는 김봉기씨 형제가 동생을 상봉했다. 2000년 7월 16일 김봉기(69세)씨가 북한에서 보내온 상봉후보자 명단 2백명에 동생 김종기(66세)씨가 포함되어있다고 통보받았다. 김봉기씨 가족은 홍천군 내면 율전리에서 살았었다. 동생 김종기씨는 당시 광원공립국민학교 생둔분교 급사로 근무하다가 인민군에 나갔는데, 횡성 부근에서 폭격을 맞아 죽은 것으로 알고 지냈었다.
북측 신청번호가 52번이라 첫 상봉에서 만날 줄 알았는데 만남은 2차 상봉으로 미뤄졌다. 2000년 11월 30일 김봉기와 김광기, 막내 김정자씨가 서울에서 김종기씨를 상봉했다. 전쟁 중 동네 아주머니들을 따라 피난을 떠났다는 셋째 김명기씨만 빼고, 4남1녀 중 4명의 형제가 50년 만에 상봉의 기쁨을 누렸다.
속초 월남실향민 최초로
주성순씨 평양가서 아들 만나
속초 최초의 이산가족 상봉자는 노학동 주성순(88세)씨로 2001년 2월 26일 3차 이산가족 방문단으로 평양을 방문해 아들 주덕권(57세)씨를 만나고 돌아왔다. 2001년 2월 26일자 <설악신문>에는 주공3차아파트에 사는 주성순씨가 북에 두고 온 아들을 만나게 됐다고 보도했다. 함남 신북청이 고향인 주씨는 북에 어린 아들과 생후 1개월된 딸의 이름만 지어 놓고 월남해 속초에 정착했다. 당시 언론보도를 보면, 주씨 아들 덕권씨는 북한에서 서해항만건설사업소 설계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속초에 거주하는 월남 실향민 신청자 중에 처음으로 상봉의 뜻을 이룬 주씨는 그 해 3월 15일 북측과의 이산가족 서신교환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편 1차 상봉 이후인 2000년 10월 2일 속초 대포동 최봉남(여, 63)씨와 최종범(61세)씨 남매가 북에 살아 있는 셋째 누나 최봉순씨를 찾게 됐다. 북측이 보내온 생사확인 의뢰자 명단을 통해 전쟁 전 양양군 속초면 내물치리에 살던 최봉순(68)씨가 오빠 최종렬, 언니 최이분, 동생 최봉화와 최봉남, 최종범을 찾는 게 확인됐다. 이 사연은 2000년 10월 14일자 <설악신문>에 보도됐다. 최봉순씨는 전쟁 당시 양양군 잠업관리소 노동자로 근무했다.
2000년 3월 15일 최봉순(여, 69, 황북 사리원시)씨가 언니 최이분(여, 81, 강원 속초)씨에게 서신을 보낸 걸로 북측 서신교환자 명단이 공개됐다. 남북은 생사확인자는 상봉은 하지 않고 서신만 교류하기로 했는데, 서신교환도 이때 한 번밖에 성사되지 않았다.
엄경선 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00년 6월 13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청호동 노인회관에서는 실향민들이 모여 감격의 순간을 지켜봤다. <설악신문> 2000년 6월 19일자 12면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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