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이 절정이었다. 그 절정의 시작에서 끝까지 내내 들었던 생각은, 자연이 내어준 이 아름다움은 그 무엇으로도 흉내 낼 수 없단 것이었다.
굽이진 길마다 오색단풍에 취한 사람들은 저마다 그 화려함을 카메라에 담느라 분주했고, 그 풍경을 지나쳐가면서 ‘여유’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쉼, 진부령 미술관이 추구하는 것이 바로 쉼이자 여유였다.
진부령 미술관이 처음 개관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의 일이다. 전석진(85, 사진) 관장이 당시 고성군 간성읍 흘리에 있던 폐쇄된 출장소를 임대하고, 그곳에 자비를 들여 미술관을 개관한 것이 시작이었다.
서울대에서 미학을 전공한 전 관장은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는 예술가는 아니었지만, 미술 평론가로 활동하면서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 바로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할 만한 공간이 빈약해 한국 미술의 대중화에 큰 걸림이 되고 있다는 현실이었다.
대관료 받지 않고 무료로 작품 전시
가난한 예술가의 꿈은 인생의 단 한 번이라도 자신만의 작품으로 개인 전시회를 갖는 것이다.
하지만 돈을 쫓지 않고 그저 예술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개인 전시회는 꿈같은 이야기였다. 전 관장은 그런 후배들에게 선물 같은 사람이었다.
진부령 미술관은 개관 이래 지금까지 대관료를 받지 않고 무료로 작품 전시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유명하다. 물론 전시를 위해 작품성에 대한 인정이 필요하지만, 작품만 좋으면 무료로 개인 전시회를 열 수 있는 길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젊은 시절엔 영화업계에 종사하기도 했고, 무역업을 하며 전 세계를 무대 삼아 돈을 벌기 위해 달렸던 세월도 있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며 드는 갈증은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쓰임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였고, 여행지로 가족과 함께 자주 들르던 진부령 고갯길에 폐허가 된 건물을 부수고 그 자리에 진부령 미술관이란 이름의 전시관을 마련했다.
10년 전 고성군에 미술관 기부
그렇게 시작된 전시는 1년에 4~5번씩, 이제 100회 가까운 역사를 지니게 됐다.
문화예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비교적 미미한 고성에 진부령 미술관은 수준 높은 미술 작품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그런 면에서 전 관장의 행보는 한국 미술계는 물론 문화예술적 지지가 약한 고성에 하나의 의미였고, 그 의미가 퇴색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10년 전 고성군에 진부령 미술관을 기부했다. 고성군에 미술관을 기부하며 걸어놓은 조건은 단 하나, 작가들에게 전시관 대관료를 받지 않고 전시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서울대 미대 출신 한울회展 진행
현재 진부령 미술관에선 한울회展이 열리고 있다.
서울대 49학번부터 87학번까지 71명의 여성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한 곳에서 만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그에겐 선배와 후배들에게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하는 기회가 마련된 것이다.
그림 중에는 올해로 90세를 넘긴 작가의 작품도 있다.
나이든 예술가들의 깊이와 젊은 후배들의 열정이 한데 어울려 고성이 문화예술의 고장으로 변모하는데 큰 몫을 담당하길 희망했다.
전 관장은 “앞으로 내가 얼마나 더 이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국 미술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 힘닿는 데까지 후배들의 작품 활동을 지원하는데, 남은 생을 바치고 싶다”고 말했다.
전쟁을 겪고, 분단의 아픔을 체험한 여든다섯이 닳고 닳은 인생이 단풍의 절정처럼 찬란해 보였다.
김미영 기자 nurugo@hanmail.net
한울회展이 열리고 있는 진부령 미술관 전시회장을 배경으로 전석진 관장이 포즈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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