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전 버릇처럼 머릿속에 드는 상상이 있다. 전화 통화를 통해 얻은 아주 기본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그 사람의 생김, 그 사람의 인생사, 그가 담긴 삶의 풍경을 그려보는 것이다.
고성 현내면 백두대간로 633에 위치한 ‘천년드림농원’을 찾아가면서 상상했던 풍경은 이랬다. 따가운 가을 햇살, 그 아래 구슬땀을 흘리며 아로니아의 열매를 채집하는 일꾼들, 그렇게 상자마다 그득하게 쌓여가는 아로니아를 보며 흐뭇해하는 농장주의 환한 미소였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백발 성성한 노부부의 얼굴은 어두웠고, 농장 그 어디에도 수확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로니아는 보통 7월 초부터 8월 말까지 수확을 마쳐야 하는데, 이미 수확 철을 넘긴 아로니아 열매들은 나무에 매달린 채 말라가고 있었다.
4년 전 고성 최대 규모로 시작
천년드림농원 신동승 대표(75, 사진)가 아로니아 재배를 시작한 것은 4년 전이다. 고성에서는 가장 큰 규모로 1만5천평에 이르는 임야에 1만2천 주(그루)의 아로니아 묘목을 심었다.
아로니아가 묘목에서 성묘가 되어 채집 가능한 크기의 열매를 맺기까지 보통 3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하니, 3년이란 인고의 세월을 견뎌 드디어 수확의 기쁨을 맛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신동승 대표에게 수확의 기쁨은 찰나였다. 아로니아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미미했고, 현재의 수확량을 소비할 만큼 시장이 조성되지 않아 수확한 대부분의 아로니아는 냉동창고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아로니아의 주성분으로 알려진 안토시아니딘은 피를 맑게 하고, 눈 건강과 간 기능 활성화에 효과가 입증되어 제약회사에서 가장 많은 소비가 이뤄지고 있는데, 문제는 국내산이 아닌 폴란드산 아로니아를 전량 수입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동승 대표는 국내산 아로니아를 대중화하고, 수입품과 비교해 질적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발로 뛰었다. 국내 최초로 아로니아 자동화 노지 재배 시스템(ITC 스마트 팜)을 갖추고, 무농약, 친환경 아로니아 재배를 위해 그 누구보다 정성으로 농장을 운영해왔다.
그 결과 강원농업기술원 농식품연구소에서 천년드림농원의 아로니아가 폴란드산에 비해 안토시아니딘 수치가 3.5배 높다는 결과를 얻어내기도 했다.
아로니아는 시고 떫은 맛이 강해 생과육으로 먹기가 쉽지 않아 주로 착즙이나 분말 형태로 가공 판매되는데, 이를 위해 군에서 3억원을 투자받아 가공공장까지 마련했지만, 이제는 먼지 가득한 창고로 전락될 위기에 놓여있다.
아내 병 치료 위해 고성에 귀농
신동승 대표는 과거 중국에서 직원 150명을 둔 큰 식당을 세 개나 운영했었다. 하지만 힘든 식당일로 아내는 병을 얻었고, 중국 사드 보복까지 겹쳐 쫓겨나듯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당시 신 대표는 아내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고, 그렇게 귀농을 결정해 고성에 자리한 지 7년을 넘기고 있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어울려 살다 보니 아내의 건강도 회복이 되었고, 놀리는 땅에 무어라도 심어 길러봐야겠단 마음을 먹고 있던 차에 아로니아 묘목 중개업자를 만나면서, 그의 말만 믿고 아로니아 재배를 시작한 것이다. ‘그냥 심어만 놓으면 저절로 자라 열매를 맺는 나무.’ 말만 들으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솔깃한 제안이었다.
농부의 양심으로 지켜왔지만…
농사에 대한 설익은 지식으로 시작된 농장운영은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농부의 양심으로 농약을 사용하지 않다 보니, 며칠만 지나도 잡풀이 자라 아로니아 묘목을 뒤덮어, 눈 뜨면 자기 전까지 하는 일이 잡초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4년을 눈, 비, 바람과 전쟁을 치르며 지켜낸 묘목들이 자라 열매를 맺고, 수확을 기다리고 있지만, 그 기다림에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있다.
뉴스에서 보았단다. 뼈마디 삭는 고통을 견디며 지어낸 농작물을 헐값에 팔 수 없어 차라리 제 손으로 뒤엎어버리는 농부의 한탄과 절규를…, 신 대표 부부는 지금의 마음이, 바로 그 농부의 심정이라고 했다.
농장을 배경으로 사진 한 컷을 부탁했다. 하지만 차마 웃어달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고성에만 아로니아 농원이 100곳에 이른다. 이것이 어떻게 신 대표 한 사람만의 이야기일까.
농심(農心)은 민심(民心)이요 천심(天心)이란 말이 있다. 하늘의 마음을 담아 기른 우리 농산물을 우리가 지켜내지 않으면, 이 땅의 꿈을 물을 수 있을까.
“공짜로 따가도 좋으니, 열매가 다 떨어지기 전에 필요한 사람들은 누구나 와서 따가도 좋다는 이야기를 기사에 꼭 넣어달라고” 마지막 인사를 전하는 천년드림농원 신 대표 부부의 하루는 너무나 씁쓸했다. 김미영 기자 nurugo@hanmail.net
천년드림농원 신동승 대표가 농장을 둘러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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