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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작업실<11> – 한국화가 조정승(상)
진도에서 속초로 온 화가
등록날짜 [ 2018년10월29일 13시03분 ]

조정승 화백은 진도가 고향이다. 진도는 최근 몇 해 동안 세월호 사고와 팽목항에서의 수습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하지만 진도는 사실 이것보다는 다른 것으로 더 유명한 곳이다. 진도 하면 우선 진돗개가 떠오르고 이 외에 진도는 조선시대에 유배가 많았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1984년 진도대교가 개통된 이후 진도는 육지로 연결됐지만 조정승 화백이 어린 시절을 보내던 진도는 배로만 갈 수 있는 섬이었다. 진도는 한반도의 서남쪽에 있는 섬이라 지리적 특성상 조선시대에 유배를 간 사람이 가장 많았던 곳이다. 따라서 예로부터 진도에는 유배문화가 잘 형성됐다. 유배문화란 유배된 사람들이 유배생활 중에 지역 주민들과 교류하면서 형성된 지역문화를 뜻한다. 유배된 이들은 흉악범이 아니라 대체로 정치범·사상범이었고 따라서 이들의 문화적 소양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중앙 정계에서 유배를 간 이들은 유배생활 중에 지역주민들과 교류하면서 중앙의 수준 높은 문화를 전했고 유배인 스스로도 유배 지역의 토착문화나 민속, 예술 등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학문적·예술적 자질들을 발전시켰다. 이런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이 유배문화이다. 이런 유배문화의 영향으로 진도는 변방의 섬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문화적 전통을 세울 수 있었다.

예향(藝鄕)에서 자란 화가
조 화백에 따르면 진도에는 작은 마을 하나에도 ‘국전(대한민국 미술전람회와 그 후신인 대한민국 미술대전)’ 입상자가 두세 명은 된다. 입선만 해도 대단한 것인데 입상자가 많다보니 이는 알아주지 않고 특선을 해야 비로소 인정해주는 분위기라고 한다. 집집마다 글씨와 그림이 몇 점씩 있으며 관공서는 말할 것도 없고 다방이나 작은 가게에도 작품들이 걸려 있다. 진도에서는 국전 특선을 받거나 심사위원을 지낸 이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고 그러한 까닭에 의지만 있다면 그들에게서 직접 배울 수 있는 기회도 상대적으로 많다. 예술에 재능이나 흥미가 없어 직접 배우지는 않는다고 해도 그런 이들을 주위에서 쉽게 만나다 보면 예술에 대한 조예도 남달라질 수밖에 없다. 조 화백은 어려서부터 이런 지역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고 진도라는 특별한 고장에서 자연스럽게 화가의 길을 걷게 됐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의 재능 또한 남들보다 앞서 있었다.
조 화백은 어렸을 때부터 미술대회에 많이 나갔고 상 또한 적지 않게 받았다. 그는 어릴 때 수채화에서 두각을 드러냈다고 한다. 그리고 중학교 때에 문인화를 그렸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학교에 걸린 문인화의 회색빛을 좋아했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서예를 시작했는데 진도가 낳은 서예의 명인인 장전(長田) 하남호(河南鎬)에게서 배웠다.
대학에 진학해서는 부친의 반대가 있었지만 그는 광주에서 한국화를 전공했다. 그의 부친이 다른 많은 부모들처럼 아들의 미래를 걱정했지만 그의 미술에 대한 열정은 너무도 컸다. 대학 시절에는 그림을 배우기 위해 목포에 있는 호남 전통화파의 상징적 인물인 남농(南農) 허건(許楗)을 찾아가 공부한 바 있다.
그러던 그는 군대에 가면서 전업 화가의 꿈을 잠시 접었고 대학을 졸업한 이후 공직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마음은 늘 그림을 향해 있었다.

그림이 중심에 놓인 삶의 궤적
조 화백의 삶을 짚어보면 그가 살아온 인생의 거처는 그림이 중심에 놓인다. 그는 미술 공부를 위해 임지를 수도권으로 옮겼고 또한 더 좋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속초에 정착했다. 진도는 남서쪽에 있는 섬이고 속초는 영동지방 북쪽에 있으니 휴전선 이남에서만 보자면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옮긴 것이다. 그가 삶에서 지나온 궤적만 짚어도 그가 뭔가 남다른 면이 있는 인물이란 느낌이 든다.
그는 공무원 임용 후 10년 동안 목포에서 공무원 생활을 했다.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후에도 그림을 꾸준히 그렸다. 하지만 그림과 직장생활을 병행하면서 자신의 그림이 정체된 시기를 겪었다. 이때 그는 결단을 내리고 인천으로 임지를 옮겨 홍익대에서 미술을 공부하게 된다. 조 화백은 대학원 진학을 생각했지만 당시 홍익대에는 야간에 다닐 수 있는 대학원 미술 과정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홍익대 미술교육원에서 그림 공부를 이어갔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석사과정보다 더 긴 3년 동안이나 미술교육원에 다녔다는 점이다. 3년 동안, 1주일에 3일은 퇴근 후에 인천에서 홍익대까지 지하철을 타고 부지런히 오갔다.
이 기간 동안 그의 그림에는 큰 발전이 있었다. 먼저 홍익대에서 한국화가 홍석창 교수를 만난 것이 주효했다. 조 화백은 홍석창 교수의 지도로 국전에서 입선을 할 수 있었다. 조 화백은 홍석창 교수와는 다른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했지만 홍석창 교수의 가르침을 통해 화가로서 크게 성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홍익대에서 유화, 수채화, 서예 등 다양한 미술 장르의 인사들과 교류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그림에 깊이를 더해줬다.
이에 더해 그가 이 당시 덕수궁 석조전을 많이 그린 것도 그의 그림이 발전한 계기가 됐다. 언젠가 조 화백은 덕수궁미술관에서 작품들을 감상하고 나오면서 좋은 작품들이 많은 덕수궁 석조전을 그리면 자신의 작품 속에 자신이 봤던 그림들을 모두 담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다. 지금 돌아보면 황당한 생각 같지만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속해서 석조전을 그리는 동안 그는 수묵화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점차 세상의 인정을 받기 시작한다.

국전 특선 공무원
조정승 화백은 1991년에 국전에 입선을 했고 국전 도전 여덟 번 만인 2004년 특선을 받았다. 그런데 이는 공직 생활과 병행하며 이뤄냈기에 더 의미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어떤 말보다 국전 특선 작가라는 말 한 마디면 화가의 실력에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조 화백은 상을 받지 못한 그림이라고 해서 못 그린 그림이라 할 수 없다고 얘기한다. 권위 있는 상을 받지 못한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면 자기변명이라 할 수 있겠지만 국전에서 최고의 영예를 누린 사람이 하는 말이라 귀를 솔깃하게 한다.                                       <다음에 계속>
이광호 객원기자 campin@hanmail.net
■조정승 작가
·현)한국미술협회 이사, 다문화 예술위원장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역임
·호남대학교 미술대학 동문
   호묵회장 역임
·홍익대학교 미술교육원 홍우회장 역임
·제10회 현대미술대전 미술상 수상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2004)
·전남미술대전 우수상(2004)
·개인전 4회(세종문화회관 등)
·그룹전 200여 회(국립현대미술관 등)
·한국미협·현대한국화협회 회원
외설악-5월의 향리(한지, 수묵담채, 50호).
한국화가 조정승 화백.
작가의 1986년 작품 ‘휴식’.
제23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 작품 ‘천년의 꿈 04-1’.
 

이광호 (campin@hanmail.net)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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